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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Jan 26. 2022

"지금이 우리의 최선이었다고 믿어줍시다"는 마지막 인사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김금희 단편소설, 2018

윤석 선배는 이를테면 이런 사람이었다. 글을 쓴다고 한다면 써야 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지루하게 설명하다가 결국 본론에는 이르지도 못하는 사람, 이제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출발선 앞에서 운동화 끈을 꼼꼼하게 매다가 탕 하는 출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전주가 긴 노래를 선택해 지루해진 부장이 야 그거 끄고 다음으로 돌려, 하는 바람에 마이크로 한 소절 부르지도 못하는 사람. 선배의 모든 것은 너무 늦거나 아니면 이른 지점에만 머물렀다. /P70, 우리가 헤이,라고 부를  때


너무 늦거나 이른 지점에만 머물렀다는 묘사는 내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책들은 너무 앞서있다 여겨지기도 했고 혹은 한 차례 이미 식어버린 경험을 구차하게 꺼내게 한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온도에 맞는 책, 나에게 돌파구가 될 만한 책을 찾고자 서치해 읽어도 그런 운명같은 책을 만나긴 쉽지 않았다.


두꺼운 겉표지를 넘겨, 책이 적힌 연도를 확인하고, 겉에도 적혀있던 제목이 또 적힌 종이 한 장을 넘기어 처음 작가의 말을 읽었을 때,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 다정하고 친절했던 것들, 하지만 가끔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들여다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밀치게 되던 마음들', 그게 내가 읽고 싶었던 문장인 걸 알았다.


온도가 같다는 게 이런 걸까. 책을 읽으며 온도가 같다고 느꼈던 적은 없다.  마음의 온도가 들어맞는다는 건 정말 순간적이어서, 이 시공간을 벗어나면 또 다시 다른 온도를 걷게 될 테니까, 그런 순간적 성격 때문에 더욱이 운명적이라 느껴지는 듯도 했다. 


너무 모든 문장을 발췌한 것 같지만, 그러고도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기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도 이 책을 꼭 읽고 함께 같은 온도를 공유했으면 좋겠다.



아래부터는 발췌문.


작가의 말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 다정하고 친절했던 것들, 하지만 가끔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들여다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밀치게 되던 마음들. 무언가를 잃어버렸음을 아프게 인정할 때에야 무언가를 쓸 용기가 생기고, 두렵지만 그 상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을 때에야 문장들이 나갈 수 있다는 건 비참한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시절에 관한 희미한 지도를 손에 쥐거나, 이제는 더 이상 같은 거리에 있어주지 않는 사람의 사사로운 기억을 ‘사사롭지 않게’ 기록해두는 건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러므로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은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라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우리가 헤이,라고 부를 때

[규카쓰를 먹을래]

27,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싶어 했고 남들이 불러주는 것도 좋아했다. 거기에는 특별하고 생동감 있고 따뜻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29, 아무튼 그러한 폭풍이 일상을 뒤흔들고 지나가면 희영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다가 그래도 용케 일어나 허물어진 마음을 보수해보곤 했다. 그러는 동안은 당연히 영 자매의 희소한 격려가 필요했고. 하지만 대학 때는 가능하던 그런 관계가 서른이 가까워지면서는 쉽지 않았다. 패턴이라는 것은 관계의 피로를 만들어냈고 여기다 일종의 ‘사는 문제’가 겹치면서 셋은 전처럼 섞여 들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만나면 즐거운 식사를 했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지만 문득문득 서로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 특별하고 희소한 우정을 유지하려 해도 솔직히 늙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마음도 그렇게 시간에 의해 변형된다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실감이 났다.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

41, 백지에 가까운 다이어리에 특별할 것 없는 일정을 적어보거나 이제는 사이가 소원해진 사람들의 SNS 계정에 들어가 댓글을 남길까 말까 고민해보는 것. 비 구경을 하거나 보도블록 사이로 난 풀잎들에 괜히 시선을 두는 것. 사실상 앞으로 낮 동안 선미가 해야 할 업무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었는데, 왜 그런 무용한 것들을 할 때만 서울에서의 시간을 버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43,포장마차에는 단골소님이 많았다. 가장 자주 마주치는 단골은 뿔테 안경을 쓴 한 남자였다. 그는 넉살이 좋아 주인 부부와 자주 대화했고 가방에 다닥다닥 붙인 와펜도 인상적이었다. (중략) 그렇게 다양하게 붙은 와펜들은 지금 그가 관심 두고 있는 세상을 지구본처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선미는 그것에 시선을 주면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미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일면들을 퍼즐을 맞추듯 생각해보곤 했다.


51, 남자의 와펜은 그간 더 늘어났지만 무엇이 원래 있었고 새롭게 생겼는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남자는 주인이 없던 포장마차에서와는 다르게 무표정했고 맛이 없는지 에그머핀을 반 정도 먹다가 내려놓았다. 어떤 날에는 모든 것이 괜찮고 제대로인듯하지만 어떤 날에는 반만 그렇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불행히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흔한 아침인걸까.


51, 그리고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사람들의 화사한 일상을 SNS로 지켜보았다.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시작되고 있는 그들의 아침이 이 작고 완전한 프레임의 사진들처럼 온전할지, 그러니까 제대로일지, 혹시 잘려나간 어느 편에서는 울고 나서 맞는 아침은 아닐지 생각하면서.


[야간행]

59, 그런데 왜인지 그 블루는 생각만큼은 멋질 것 같지 않아. 그냥 고요할 것 같아, 무섭게 적요할 것 같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 오지 않을 것 같아, 파도라는 건 밀려와서 다시 밀려나가야 하는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그냥 좀 떨어진 채 서서 자넨 누군가? 할 것 같아,


[파리 살롱]

66, 그렇게 작은 상황의 변화로도 이제 약속은 없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시드는 감정이란 그렇게 슬픈 것이었다.


67, 윤은 메뉴판을 펼쳤고 그중 가장 따뜻한 음식, 너무 따뜻해서 지금 자신에게 찾아든 분명한 상실의 신호에도 마음이 풍랑을 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음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중략) 파리 살롱을 다시 찾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불편듯 추위를 느끼고 혼자임이 실감된다면 어디든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가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따뜻한 것, 아주 따뜻한 것을 먹겠다고.


[우리가 헤이,라고 부를 때]

70, 윤석 선배는 이를테면 이런 사람이었다. 글을 쓴다고 한다면 써야 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지루하게 설명하다가 결국 본론에는 이르지도 못하는 사람, 이제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출발선 앞에서 운동화 끈을 꼼꼼하게 매다가 탕 하는 출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전주가 긴 노래를 선택해 지루해진 부장이 야 그거 끄고 다음으로 돌려, 하는 바람에 마이크로 한 소절 부르지도 못하는 사람. 선배의 모든 것은 너무 늦거나 아니면 이른 지점에만 머물렀다.


77,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히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온난한 하루

[류, 내가 아는 사람]

86, 버젓이 울라고 만들어 놓은 장례식장에서 울지 못하고 왜 저렇게 옮겨 다니며 우는 걸까. 여자에게는 무언가 있어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는 반동력이 큰 무언가 몸 안에 있어서 어쩌지를 못하는 듯했다.


88, “그럼 당연히 안 괜찮죠. 우리 오빠가 택배 기사거든요.” (중략) 나는 오빠 덕분에 이 도시의 모든 집이 주소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변두리로 나가면 무허가 건물이 많고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서 택배를 시키고 있었다. 집을 찾을 수 없어서 전화해보면 받아서 어디어디로 오라고 하니까 안 갈 수도 없고, 어떻게 어떻게 찾아가보면 정말 택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91, 실패한 농담이 상대에게 주었을 모욕에 대해 밤길을 걸으며 사과하고 싶어 하던 사람, 다른 어떤 말보다 사람을 보고 온다, 라는 말을 수면 위의 파문처럼 마음을 울려 받아들이던 사람.


[17/24]

93, 그 블링블링한 얼굴에 비해 은지는 너무나 내추럴했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이 도를 지나쳐 스스로를 자신 없게, 움츠러들게 했다.


94, 남수는 언제나 배고파 했고 언제나 먹고 싶어 했다. 은지가 그러면 너 정말 돼지 된다고, 사람이 돼지가 되면 도무지 사람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고, 사람이 안 되는 건 괜찮지만 취급을 못 받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우리는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기다려지는 서른 살, 안정이 찾아옸어요 서른 살, 아홉수를 넘었어요 서른 살, 뭐라도 되어 있을 것 같았어요 서른 살. 서른 살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취급에 주의해야 했다. 세상은 그 부주의의 가능성이 요주의 되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너는 지금 닭튀김은 먹지 마, 은지는 남수에게 말했다.


103, 그래도 비워 있으니 올 수 있었다. 남수가 올 수 있었고 남수만 온다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남수는 이 도시를 떠돌고 있고 돌아오지 않고 싶을 수도 있지만 은지는 비워놓았다. 자기만은 그 비워둠을 양해하고 싶었다. 그런 양해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떠한 보류도 없이 기꺼이 취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로의 기도]

112, 그 순간 주용은 어쩌면 아주 어려서부터 영란의 마음은 전혀 다른 멜로디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오히려 듣는 이의 관성화된 귀와 마음이 아닐까. 어느 괴롭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수업 시간의 끝을 알리는 <소녀의 기도>처럼.


116, 좀 더 식은 마음의 상태가 되어 그 사랑에 대해 음미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이미지가 탈색되거나 변형되지 않고 오로지 영란 자신의 해석만으로 연주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 싶으면서,


[영건이가 온다]

118, 그것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문답들은 너무 지루해서 그런 소개를 받다가는 얼마 있던 서로에 대한 관심조차 시들해질 듯했다. 하지만 그때는 질문 내용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의 상태, 그러니까 나란 사람의 특징, 취미, 유년 등이 술술 나오던, 대학 진학처럼 많은 인간관계를 단번에 형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지니는 자기표현의 열정 같은 것이 있던 때니까 질문은 질문들을 낳아서 어느덧 나는 영건이가 보아의 열성 팬이라는 것을 알았고 영건이도 내가 무척 노동집약적인 연애를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4, 늘 있는 좌석버스의 난폭 운전 속에 그렇게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의 머리카락이나 소매나 어깨가 스칠 때면 나는 이런 계절을 보내면 보낼수록 언젠가는 이 순간의 기억들을 물리적 통증에 가까운 아을 각오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울 수 없으리라 서늘하게 예감하기도 했다.




춤을 추며 말없이

[춤을 추며 말없이

167, 양양 집에 들어서며 그대로 그때가 할아버지가 누군가와 함께 살았던 마지막 시기였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조용히 아파왔다. 당신이 돌아와 대문을 닫으며 더 이상 그것을 밀고 들어올 누구도 없었다는 것, 열릴 리가 없다는 것. 그건 젋은 내가 자취방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단절감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71, 시골의 안전한 숲에 숨듯이 살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불안과 불신, 공포와 적의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런 것들을 싸안고 있을 때에야 자기 존재가 증명되는 것처럼.


177, 돈가스를 잘라서 우걱우걱 씹다 보니 그 소스는 지긋지긋하고 막막하고 따분했던, 선명한 분노와 어긋남의 결이 있었던 할아버지와의 동거를 떠올리게 했다. 햄버그 스테이크가 있는 테이블에서 맡았던 카레 가루 냄새가 여기서도 나는구나, 그러니까 그런 건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마치 공장의 제조 소스처럼 일관되고 표준화된 추억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건 어떤 이별에 대한 뒤늦은 실감이자 그리움 같은 것이었고 동시에 미안함이기도 했다.


180, 그때마다 믿게 되는 건 그렇게 말없이 춤을 춰보는 어느 밤이 그래도 할아버지와 소년에게 있었으리나느 사실이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의 어느 날에 우리가 그랬을 것처럼, 햄버그 스테이크가 있는 테이블처럼 너무나 당연하고 몹시도 그립게.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

207, 상준은 슬프고 괴롭다는 것은 연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가 보는 사람이 있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해서 하는 연기였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어쩌면 상준은 자신이 주현에게 그 고양이같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애정과 애착이 사라졌지만 이미 규정된 관계가 있어서 그 역할에는 충실하고 싶은 존재.


208, 그는 "지금이 우리의 최선이었다고 믿어줍시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모임이 끝나고 나오면서 주현은 모두들 바보 같아, 라고 말했다.


[그 여름 아케이드]

215, 여름 따위 얼른 가버리라고 영현은 여름 내내 중얼거렸다.열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스팔트를 고행하듯 걸으면서 겨울에 예약해놓은 삿포로행 비행기표를 떠올렸다. (중략) 정말이지 오로지 혼자 산뜻하게 고립될 수 있으리라.


217, 다닥다닥 붙은 식당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리와 식사의 열기, 웅 하는 환풍기 소음만 들어도 충분히 상상되는 열풍, 거기에 뚝배기에 담긴 삼계탕과 추어탕, 설렁탕과 선지해장국, 1인분의 닭복음탕을 이열치열의 정신으로 맹렬히 비우고 있는 사람들의 열의까지 가세해 아케이드는 부글부글 끓고 잇었다.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힘이란 걸 낼 수 없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그런 '먹는 행위'에 담긴 생의 결기까지 계산한다면 아케이드에는 도무지 셈할 수 없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223, 영현은 늦여름이 다 되었는데도 이렇게 참을 수 없이 덥고, 1분이라도 서 있으면 얼굴이 까맣게 탈 것처럼 햇살이 쏟아지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영현이야 한 끼 식사를, 그 숙성된 제주산 돼지고기를 거부할 정도로 세상의 윤릴와 누군가들의 복지에 예민하지는 않지만 세상은, 아니 적어도 이 여름은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모두들 조금씩 취해 있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여름이라고.


[미국식 홈비디오]

233, 그날따라 미역은 단 한 번도 잘리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이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미역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도전적인 의도가 있는 것처럼 길었다.


235, 거기 사장님은 뭔가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효율과 절약, 속전속결, 단축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 메뉴판에도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아니라 '김치찌', '된장찌'까지만 써놓았는데 매큐가 그런 좀 키치적이고 맞춤법 파괴적인 현장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 쓰인 한국어를 이해하려고 할 때 나는 난감해지는 느낌이었다.

 

241, 그러는 동안 거리를 걷다 보면 매튜의 비디오가 떠오르면서 이런 의문들이 생격나곤 했다. 밤이면 더욱 도드라지는 편의점 간판들은 어째서 저렇게 꼭 24와 25 같은 숫자를 달고 있는 건가, 저녁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는 대부분 집일 텐데 왜 저렇게 많은 이들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송신하고 있는 건가.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매튜에 대한 궁금증이 되살아났지만 이내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할까 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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