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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Apr 28. 2022

그녀의 꿈이 나에게 온다

[독후감]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초파리 돌보기(임솔아)

부모에 대한 자녀의 세레나데는 저릿저릿하고 아련하고 포근한 맛을 자아낸다.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볼 때 느끼는 경탄, 소임을 다하고 미련 없이 저물어 가는 것을 향한 존경이 세레나데에 담겨 있다. 부모-자식 관계는 문학 내에서 고유한, 불변의 기본값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예시 없이도 '모성애', '부성애'란 단어로 표현될 기본값의 형태와 감정의 깊이에 대해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관계가 깊고 진해도 자녀의 글 속에 소재로서 넘어오는 순간, 부모의 존재는 의도된 형태와 모양으로 박제돼 기록된다.  


“엄마가 소설에 나오는 거야? 원영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부터 원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다. 지유의 손을 꼭 잡고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엄청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엄청난 이야기인 것은 명백했지만 소설로 쓰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기시감이 넘치는 레퍼토리였다. / 25page 


<초파리 돌보기> 이 책에 대해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 쓸까 하다가, 결국 이 책을 '딸과 엄마의 이야기'라 요약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작가는 지유와 원영을 번갈아 주목하긴 하지만, 둘에게 배정된 글 분량과 무관하게 이미 원영(엄마)은 지유 이야기 속 존재다. 딸과 엄마는 그토록 자주 면밀하게 탐색하고, 서로를 알아간다고 해도 결국 같아질 수 없다. 그래서 엄마가 딸에 가지는 소망은 언제나 좌절된다. 조금 아쉬운 정도로 실패하느냐, 완전히 좌절되느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성별이 같다는 점은, 딸(지유)과 엄마(원영), 그녀와 그녀가 부모-자식 간의 유대 이상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그녀에서 그녀에게로 환경이 대물림 된다. 그녀가 겪은 일들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그녀가 된다. 엄마를 지칭할 때 '그'라는 주어보다는 '그녀'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유다. 


원영은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 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 가져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삼십 년 동안 국수를 먹은 여자 이야기... 원영은 조금씩 이야기 말을 바꾸어가며 말했다. 거의 소설이 되어갔다. 원영은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무시했던 일화들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어내다시피 한 이야기지만 속이 후련했다. / 29page


딸은 엄마를 기록하고, 엄마는 자신의 소망을 딸에게 투영한다. 이 관계는 권력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소설가 지유에게 '해피 엔딩'을 쓰라고 한 원영의 요구는 쉽게 거절된다. 반면, 문예지나 소설집을 굳이 사서 모으지 말라고 한 지유의 말은 원영이 몰래 그것들을 창고에 모아놓게 한다. 왜 엄마의 소망은 대개 고루한 성차별과 순진무구한 발상을 기반한 것처럼 들리는 것일까? 현실에 치여 여유가 없는 딸들은 엄마의 소망의 깊이를 들여다볼 기력이 없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문득 느꼈던 찐득한 갈망은 일상으로 복귀한 순간 흩어져 사라진다. 


이 소설은 해피엔드를 써달라는 원영의 부탁에서부터 엉키기 시작했다. 행복한 소설을 써보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원영에게 알았다고 대답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행복하게 끝이 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나는 말했다. 사실은 소설을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원영이 말하는 해피엔드는 일종의 거짓처럼 느껴졌다. 기적처럼도 느껴졌다. 기절을 행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 같았다. 크면 원영에게 으리으리한 집을 사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약속과 다를 게 없었다. / 작가노트, 41page


작가는 원영에게 결말을 정할 권한을 넘겨준다. 지유는 가장 시시한 문장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 마지막 문장이 관계에 대한 재정의로 읽혔다. 시혜적인 태도는 어쩔 수 없겠지만, 어쨌든 지유는 자신의 인생의 지분 한 켠을 원영에게 내어준다. 시시함 안에 담긴, 찐득한 갈망을 감당해보겠다는 선언인 듯했다. 실패하더라도 따뜻할 시도라 생각했다. 


   


그녀는,


가끔 이유를 모르겠는 감정이 넘실대는 눈으로 나를 지켜볼 때가 있다. 그녀는 아들과 통화를 하고 나서도 그런 눈을 한다. 안락한 침대에 빅토리아 시대 영화를 틀어 놓고 포근함 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녀가 그런 눈을 할 때마다 어떤 불안한 공간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첫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스스로 자처했을 끊임없는 불안과 사랑의 공간으로. 


그녀와,


지겨울 정도로 오래 같이 있고 싶다.  어쩔 땐 그녀의 소망이 내 신념과 충돌하더라도 찐득한 갈망을 감당하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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