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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릭 May 24. 2024

내향인이 해외에서 겪는 취업난

일하고 싶어. 아니, 일하기 싫어

그땐 빨리 벗어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다른 일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6화에 이어서)  

   



무작정 매니저한테 그만두겠다고 얘기한 다음, 마지막 근무일까지 2주간의 시간을 가졌다. 2주 안에 일을 구하는 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근본 없는 자신감이었다. 어느 정도 대안을 마련해 놓고 그만뒀어야 했는데, 대책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만두겠다고 말하니 매니저가 더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아서 좋았지만, 하루하루 다가오는 퇴사 날과 일이 구해지지 않는 압박감에 점점 후회가 몰려왔다. 좀 더 버틸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다시 하겠다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할까. 얼마나 마음이 요동쳤는지 모른다. 우습게도 일을 그만둘 때가 다가오자, 나의 저질 체력도 장시간 서서 일하는 근무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일이 맞지 않아서 그만두겠다고 말을 뱉었고 사직서까지 썼는데 어떻게 무를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나의 자존심이 그것만큼은 도무지 허락하질 않았다. 그것이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걸 알았으면 뱉은 말이라도 정정했을 텐데, 그땐 낮아진 자존감에 자존심만 높아서 매니저한테 빌빌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굽히고 들어가면 안 그래도 찌그러진 자존감이 나의 위장과 함께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속에도 없는 번지르르한 빈말도 못 하는 사람이라 나를 지켜내는 게 먼저였다. 그래, 그땐 그만두는 게 최선의 결정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구인정보를 뒤졌다. 인터넷뿐 아니라 한국에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워크인 이력서 지원(직접 방문해서 지원하는 형태)도 도전했다. 내성적인 사람에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심정을 공감할 것이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여전히 많은 나라에선 이력서를 워크인으로 지원한다고 하여 내 안에 두려움을 깨고 도전하는 것이 정말 정말 힘겨웠다. 전날 야심 차게 이력서 10장을 출력해 놓고 막상 가게에 들어가려니 어찌나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다리가 호달달달 떨리던지. 근처에서 왔다 갔다 몇십 분을 서성거리다가 겨우겨우 한 곳에 들어가서 사람 구하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한인 가게였는데도 극도로 긴장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사람 구하시나요?” (이 한 문장을 몇 번을 되뇌고 가게 문을 열었는지 모른다.)

“아니요.”

“알겠습니다.” (누구보다 빠른 퇴장)     



1분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문제인데, 그만큼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한국인 매니저 밑에서 영어도 못하고 손도 느리다고 갈굼을 받다 보니, 외국인들과 같이 일하는 건 더 자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외국인들하고 더 부딪혀야 영어가 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도 배우느라 힘든데 말귀까지 못 알아들으면 내가 너무 바보 같고 지금보다 더 큰 자괴감을 느낄 것 같았다. 일단 내 수준에 맞는 곳을 찾아서 차근차근 영어를 늘려가고 싶었다.  

   



뉴질랜드는 초밥이 인기가 많은지, 한인 커뮤니티엔 초밥 가게에서 일하는 구인정보가 많이 올라왔다. 캐셔나 서빙만 하는 포지션도 있었지만, 대부분 초밥도 같이 만들어야 하는 올라운더(모든 역할을 골고루 하는) 형태가 많았다. 자격 요건에는 손이 빠른 사람을 원했다. 카페를 포함해서 키친핸드를 구하는 음식점도 마찬가지였다. 손이 느린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기본영어 가능한 사람이 지원하라는 자격 요건에도 멈칫했다. 나는 과연 기본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인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손도 느려, 영어도 못 해, 체력도 약해.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긴 한 걸까. 가슴이 갑갑하고 절망스러웠다. 일을 너무 구하고 싶은데, 구인정보만 보면 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서 자존감이 곤두박질쳤다.     



뉴질랜드에서 겪는 취업난은 한국에서 겪는 것과 다른 종류였다. 한국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겪는 어려움이라면, 이곳에선 애초에 선택지가 좁아서(영어를 못하니까, 또 못한다는 생각에 묶여있는 상태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힘든 어려움이었다. 경험해 보니 전자보다 후자가 더 괴로웠다. 한국에선 부모님한테 의지라도 할 수 있지, 여기에선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고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생존해야 했다. 일을 너무 하기 싫은데 또 일이 너무 간절했다. 처절한 현실이었다.    



 


그렇게 나의 결정을 책임지고 생존하기 위해서 겨우겨우 일을 구했다. 그것은 청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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