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릭 Jun 18. 2024

한 달 만에 눈물겨운 외식

처음 겪은 생활고

청소 일을 그만두고 간만의 휴식을 가지며 교회에서 함께 가는 선교여행을 준비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흐름상 다음으로 미루고 선교여행을 다녀와서 새롭게 일을 구해야 했던 이야기부터 해보려고 한다.     



바누아투로 7박 8일 선교여행을 다녀와서 크리스마스까지 쉬고 뉴질랜드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새로웠다. 불꽃놀이가 시티에 있는 스카이타워를 중심으로 펑펑 터졌다.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불꽃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금방 끝나버렸다.

    

그렇게 현실로 돌아왔다. 선교여행과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행복했으나, 현재의 나는 다시 새로운 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치 너무 짧아서 아쉬웠던 불꽃놀이 같았다. 세 번째 구직해야 하는 이 상황은 정말이지, 지겹게 느껴졌다.      



달콤한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도 집세와 생활비는 계속 나가고 있었다. 청소하며 조금 모아둔 돈으로 선교여행도 다녀왔기 때문에,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세 번째 구직은 더 힘들었다. 비자기간이 4개월 정도 남은 상황이어서, 이력서나 문자 지원부터 거절당하기 시작했다.      



일을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식당 서빙도 지원했으나, 하루 3시간씩 주 6일로 총 18시간밖에 근무 시간을 주지 않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면접을 보고 고민 끝에, 트라이얼에 가지 못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최소 20시간은 일해야 빠듯하게나마 집세도 내고 생활비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구인 정보를 찾은 끝에, 초밥집 서빙으로 일하게 됐다. 집에서 조금 멀지만, 주 4~5일 출근에 20~25시간을 준다고 해서 지원했다. 면접 때도 그 점을 확인했다. 매니저가 트라이얼을 일주일정도 가지고 근무를 결정하자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점은 면접 때 내 나이를 물으며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나보다 나이가 더 어려서 내가 기강을 잡고 중간 역할을 잘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꼰대스러운 말이 불편하긴 했지만, 다른 곳을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여서 일단 시작했다.     



일단 시작한 게 문제였을까. 트라이얼을 일주일 하고 결정하자던 매니저는 자꾸 말을 바꿨다. 트라이얼 기간은 계속 연장되어 3주가 되어갔다. 어떤 주는 10시간 어떤 주는 꼴랑 하루 나가서 3시간 근무한 게 전부였다. 주마다 집세는 계속 나가고 수입보다 지출이 더 큰 마이너스 상황이 이어지면서 통장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나는 점점 불안했다. 처음 겪는 생활고였다.     



그저 돈을 좀 더 모아서 뉴질랜드를 여행하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근무 시간이 적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교여행 마쳤을 때, 뉴질랜드 여행하고 바로 한국에 갔을 텐데. 끝없는 후회가 밀려오면서 괴로웠다.     



그땐 그때 나름의 이유가 또 있었다. 뉴질랜드는 12~2월이 여름이고 성수기다. 예약을 미리 하지 않으면 버스나 숙소 자리도 없어서 성수기를 약간 피해서 조금 저렴한 금액으로 여행하고 싶은 합리적인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악덕 업체로부터 손해를 입은 상황인데, 내가 결정을 잘못한 것 같아서 자꾸만 나를 자책했다. 언제 또 이렇게 해외에 나와서 살 수 있겠나 싶어서 최대한 오래 잘 지내보려고 했는데 왜 나의 워홀은 끝까지 힘든 걸까. 한숨이 푹푹 나왔다.     



그럼에도 살아야 했고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3주까지 질질 끄는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는 열이 폭발했으나 매니저에겐 최대한 분노를 덜어내고 확실하게 결정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지금 경제적으로 상황이 어려우니 정식적으로 근무하게 되면 약속했던 시간을 꼭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되는 세상에서 그래도 나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자, 그다음부턴 맞춰서 시간을 받았다.     



최소한의 생활비로 지내며 외식은커녕 식비도 아껴야 할 판이었다. 과일도 저렴한 과일 위주로 골라서 사 먹었고, 음식 재료도 쪼개고 쪼개서 요리했다. 소소하게 사 먹었던 간식도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가난한 워홀러의 눈물겨운 생존이었다.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가 뭘 먹으러 가자 해도 지금은 어렵다고 다음을 기약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참아 정상적인 급여를 받게 되었을 때, 드디어 외식을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한국에선 수시로 사 먹었던 외식이었는데 한 달 만에 외식을 하니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웠다. 뉴질랜드에서는 주로 요리를 해서 먹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먹고 싶은 거 참아가면서 손꼽아 외식했던 건 처음이었다. 돈이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것과 돈이 없어서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외식이 더 값지게 느껴졌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생존을 위해 버티고 버텨온 스스로가 기특했다.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것이 제한되었을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