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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스크린을 만날때..._7

"레퀴엠(Requiem for a Dream)"

by 이세현
“레퀴엠(Requiem for a Dream)은 중독과 환상, 그리고 인간의 취약함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왜 우리에게 ‘희망적 환상’은 때때로 악몽이 될까?


중독은 흔히 “조금씩 빠져들다 결국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방통행 길로 묘사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환상’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걸까?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의 '레퀴엠(Requiem for a Dream, 2000)'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결국 중독의 무서운 덫에 걸려들어 환상의 실체가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선명하고도 충격적으로 그려낸다. 헤로인, 다이어트 약, 혹은 스타덤의 유혹 등, 그들의 ‘이상’은 짧은 황홀과 목적의식을 선사하지만, 결국 “이 환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잔혹한 현실이 그들을 덮친다.


왜 이 영화의 중독과 붕괴 이야기가 ‘강화 이론(Reinforcement Theory)’과 인간의 취약성이라는 관점에서 큰 울림을 주는 걸까? 본문에서는 레퀴엠 속 인물들의 중독 행태, 환상과 현실의 충돌, 그리고 우리 내면에 자리한 연약함을 조명한다. 현대 중독 연구와 행동 강화 모델, 더 나아가 “환상”이 인간 의사결정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들을 엮어볼 때, 이 영화가 단순한 비극 이상으로, “왜 환상에 매달리고, 그것을 잃었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려주는 깊은 주제 의식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네 인생을 묶어버린 ‘절박한 꿈’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레퀴엠은 해리(자레드 레토), 그의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널리), 친구 타이론(말론 웨이언스), 그리고 해리의 어머니 사라(엘렌 버스틴)까지 네 캐릭터의 파멸적 이야기를 교차해 그린다.


해리와 타이론: 헤로인 거래로 큰돈을 벌어 빈곤에서 벗어나리라는 환상을 품는다.

마리온: 패션 부티크를 열겠다는 꿈으로, ‘마약의 판타지’에 기대면서도 잠시의 환희와 현실 사이를 갈팡질팡.

사라: TV 프로그램에 나가서 뽐내고 싶은 ‘스타’ 환상에 사로잡혀, 빨간 드레스를 입기 위해 다이어트 약(암페타민류)을 복용한다(Aronofsky, 2000).


중독적 물질은 처음엔 ‘꿈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보이며 일시적 희열을 선사한다. 그러나 사계절(영화는 계절별로 나눠 전개된다)이 흐를수록, 환상은 점점 현실에 무너지고, 중독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며, 네 사람 모두 파멸적 최후를 맞게 된다.



중독 심리학: 쾌락을 좇다가 추락하는 이유


중독의 정의: 멈출 수 없는 탐닉과 파멸의 징후

미국정신의학회(APA, 2013)에 따르면, 물질 사용 장애(substance use disorder)는 통제 불능, 내성, 금단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기능을 잃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 다른 물질(헤로인, 암페타민 등)에 의존하며, 끊을 수 없을 만큼 사로잡혀 있다. 뇌 과학적 관점에서, 반복된 약물 사용은 보상 회로를 장악하여, 인생 목표나 가족, 인간관계보다 마약을 우선시하도록 만든다(Koob & Volkow, 2010).


회피와 즉각적 보상: 중독의 출발선

종종 중독은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외롭고 힘든 현실을 회피하고자 할 때 시작된다. 영화 속 해리와 마리온은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사라는 자신감을 잃은 노년의 외로움에서 도망치려는 마음이 강하다. 이런 심리적 취약점이 “이거면 지금 당장 기분 좋아질 수 있어!”라는 마약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도록 만든다(Alexander, 2008; Khantzian, 2013). 고통에서 해방되는 즉각적 보상은, 추후 엄청난 댓가를 몰고 온다는 사실을 쉽게 잊게 만든다.


내성과 가속화되는 파국

중독이 심화되면 ‘내성(Tolerance)’이 생긴다. 같은 쾌감을 얻으려면 점점 더 많은 약물이나 더 위험한 방식을 택해야 한다(Robinson & Berridge, 2008). 해리와 타이론의 ‘마약으로 더 큰돈을 벌겠다’는 구상은, 결국 둘 모두가 완전히 마약 의존 상태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마리온 역시 “조금씩만”이라던 시작이 결국 몸과 마음을 완전히 옥죄게 되면서, 끔찍한 선택을 강요당한다. 사라는 한 알, 두 알, 점점 늘어가는 약에 중독되어 환각증세로 시달리고 만다.



강화 이론: 뇌는 왜 ‘더 많은 자극’을 원할까?


정적·부적 강화: 쾌락 얻기 vs. 고통 피하기

행동주의 이론에 따르면, 강화(reinforcement)는 행동 빈도를 높이는 요인이다(Skinner, 1953).


정적 강화: 약물을 복용했을 때 찾아오는 ‘오~ 시원하고 짜릿해!’ 같은 쾌감.

부적 강화: 금단이나 우울, 절망감을 약물로 덜어내거나 회피하는 작용(Baker et al., 2004).


영화 속 네 사람은 모두 처음엔 ‘긍정적 리워드(희열, 기쁨)’에 이끌려 시작하지만, 갈수록 ‘끊으면 찾아올 끔찍한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계속 복용을 이어간다. 즉 쾌락+회피 두 가지가 결합되어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전형을 보인다.


간헐적 보상의 강력함

더욱 무서운 건, 이 보상이 불규칙적(intermittent)일 때, 중독이 더 심해진다는 점이다(Ferster & Skinner, 1957). 마약 딜(Deal)이 잘 돼서 돈을 벌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사라의 다이어트 약 복용도, 가끔은 체중이 빠지는 것 같지만 아닐 때도 있다. “가끔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이 도박 중독과 비슷하게 작용하여 “이번엔 잘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떨쳐내기 어렵게 만든다(Griffiths, 2009).


대안 Reinforcer 부재

건강한 상태에선 ‘내가 기쁨을 느낄 만한 다른 활동’을 찾아갈 수 있다(Miller & Rollnick, 2013). 그러나 레퀴엠 속 인물들은 대체할 만한 강화(직업, 인간관계, 성취감 등)를 상실한다. 해리는 중독 외에 다른 ‘돈버는 길’이 없고, 사라는 외로운 집안에서 TV만 바라볼 뿐이다. 어떤 것도 마약(또는 다이어트 약)이 주는 즉각적 쾌락을 대체해주지 못해, 결국 선택의 여지 없이 중독에 매달린다.



환상 대 현실: 꿈꾸는 상태의 유혹


‘환각’ 같은 낙원: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

중독은 화학적 쾌락만이 아니라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라는 심리적 환상도 준다. 사라는 TV에 출연해 ‘빨간 드레스’를 입고 당당히 서는 스스로를 상상한다. 그 환상이 amphetamine(각성제)로 인해 더욱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변한다(Aronofsky, 2000). 이런 환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지만, 사람이 계속 매달리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Wegner, 1994).


인지 왜곡과 자기기만

중독자들의 공통된 특성 중 하나는, “내가 상황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Beck et al., 1993).


해리: “이번 거래만 성공하면, 우리 다 신나게 살 수 있어!”

마리온: “잠깐 나쁜 선택을 해도, 결국 돈 벌어서 가게 차릴 거야.”

사라: “조금만 더 약 먹으면, TV 쇼에서 모두 나를 칭찬해 줄 거야.”


이런 억지 낙관이 계속해서 현실 검증을 무시하게 만들고, 한 번에 ‘딱 한 번만 더’라는 변명을 반복하며 파멸로 치닫는다.


시각적으로 깨지는 시간감각

영화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감각’을 몽타주, 빠른 컷 편집, 펄스적인 사운드로 표현한다(Hanson, 2010). 약을 섭취할 때마다 눈동자가 확장되고, 심장이 뛰며, 순간적 희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는, 중독 강화 사이클을 시청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주인공들은 한 순간의 ‘도취감’ 속에서 진짜 삶의 시간 흐름을 잊고, 오직 다음 ‘한 방’만을 갈망한다.



인간의 취약성: 중독 뒤에 숨은 사회·심리적 배경


빈곤과 소외가 불러온 벼랑 끝 선택

해리와 타이론이 범죄와 마약에 손을 대는 배경에는, 제대로 된 일자리나 희망이 부족한 사회적 현실이 깔려 있다(Wallace, 2015). 마리온은 부유한 집안이지만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매고, 사라는 남편도 없이 TV밖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 이들은 정서적·사회적 지지체계가 부실하니, 중독이란 탈출구에 더욱 쉽게 빠져든다(Alexander, 2008).


연결감과 의미의 상실

연구에 따르면, 중독은 진정한 유대감이나 삶의 의미가 결핍될 때 강화된다(Hari, 2015). 타이론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이 있고, 마리온은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독립적인 삶이 좌절되자 내면적 공허를 느낀다. 사라는 외로운 일상을 채워줄 가족이나 친구 대신 TV 속 가상의 환영을 붙잡는다. 그 결과, 마약이 그 공허를 순간적으로 메워주는 듯해 보이지만, 결국 더 큰 고립에 빠지게 된다.


신체와 정신의 몰락

영화 후반부, 해리와 타이론은 심각한 육체적 손상을 입는다(해리의 팔 감염 등), 마리온은 절박한 ‘약값 마련 수단’으로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된다, 사라는 정신병원에서 끔찍한 전기충격요법을 받는다. 이것은 중독이 단지 정신적 문제를 넘어 몸과 영혼 모두를 무너뜨린다는 사실(Koob & Le Moal, 2005). “중독”은 실제 삶 속에서 한계치까지 몰아가며,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추락의 가속도: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은 언제?


해악의 점진적 증폭

중독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원치 않았던 더 큰 악행이나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Miller & Rollnick, 2013). 영화에서 해리와 타이론은 마약 확보를 위해 위험한 일을 벌이고, 마리온도 자존심과 존엄을 버리면서까지 약을 구한다. “한 번 더”라는 생각이 반복되며, 내리막길에서 감당 불가능한 사건들이 터지는 패턴은 중독 이론에서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구간”과 맞닿는다(Pickard & Ahmed, 2018).


무너지는 사회적 유대

또 하나 중요한 건, 중독으로 인해 주변 인간관계가 붕괴된다는 점이다. 해리와 마리온의 사랑은 거래와 의심, 불안으로 망가지고, 타이론은 해리에게조차 도움받기 힘들게 된다. 사라는 이웃이나 아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환각과 망상 속에 점점 고립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어느 누구도 남지 않아, 모두가 스스로 악몽을 떠안게 된다(Peele, 2016).


충격적 결말

영화의 마지막은 각자 극단적인 결과에 내몰린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사라는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을 받고, 마리온은 치욕적인 성적 착취에 빠지고, 해리는 감염된 팔을 절단하고, 타이론은 감옥에서 고통받는다(Aronofsky, 2000). 화려한 꿈을 좇았던 이들이 맞닥뜨린 결말은, 그 어떤 해피엔딩도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증명한다.



심리학적 통찰: 환상, 회피, 그리고 위태로운 희망


문제회피 전략의 덫

중독은 대개 “고통을 마주하기보단, 마약이나 약물을 통해 임시로 없애려는” 행동 패턴에서 시작된다(Khantzian, 2013). 레퀴엠에서 네 명 모두 직면해야 할 어려움—가난, 외로움, 자기 정체성 혼란—을 직접 해결하려 하기보단, 마약과 환상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는 아주 잠깐의 위안 뒤에 더 큰 추락을 부른다. 행동치료나 상담에서는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핵심(Carroll & Onken, 2005), 그러나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런 도움을 일찍부터 받지 못한다.


사회적 책임과 예방의 시선

레퀴엠은 개인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사회가 제공하는 자원이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배경도 큰 요인이다(Volkow et al., 2017). 이런 구조 하에서 ‘순간의 환상’이 더욱 유혹적으로 다가오고, 중독 예방은커녕, 재활 기회조차 닿지 않는다. 영화는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진 않지만, 우리가 더 큰 틀에서 “어떻게 이들을 도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인물 간의 작은 온기와 가능성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척 암울하지만, 곳곳에 짧은 감정적 교류가 있다. 예컨대 해리가 어머니 사라를 감싸안는 장면, 타이론이 어렴풋이 회상하는 유년 시절 엄마와의 기억, 마리온이 자신의 디자인 스케치를 말할 때 비치는 반짝임 등. 이런 순간들은 “만약 서로 충분히 연결되고, 환상을 벗어나 진짜 대화를 나누었다면, 조금은 달랐을지도?”라는 여지를 보여준다(Brown, 2012). 하지만 결국 영화는 그 희망이 ‘의미 있는 지원’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때 어떤 파국이 닥치는지를 시사한다.



환상의 무거운 대가를 마주하기


레퀴엠(Requiem for a Dream)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갈망이 어떻게 중독과 뒤섞여서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부식시키는지, 그 파멸적 과정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행동 강화 이론과 중독 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이상’을 실현하려는 시도가 결국 약물과 환상에 의해 비틀어지고, 지속적인 강화 사이클 속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세상이 던지는 압박과 개인 내면의 외로움은, 작은 환상이라도 붙잡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환상이란 “오래가지 않는 기만”임을 폭로한다. 우리가 외면한 현실은 결국 두 배, 세 배의 무게로 돌아와, 이들의 일상을 처절하게 짓밟는다. 심리학적 해석을 더하면, 중독은 단지 약물의 화학적 작용을 넘어, ‘삶의 의미가 결핍되고 사회적 연결이 단절된’ 곳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것. 레퀴엠은 이를 잔혹하게 확인시켜주는 사례다.


혹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꿈이 필요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레퀴엠이 보여주듯, 그 꿈이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고, 현실과 끊임없이 단절된 채 쾌락만 추구한다면, 결국 눈앞에 기다리는 건 깊은 나락일 뿐이다. 진정한 희망이 되려면, 우리에겐 ‘성찰’과 ‘연결’, 그리고 ‘지원’이 필요하다. 끝내 무엇도 제공받지 못했던 영화 속 인물들의 ‘꿈’은, 그렇게 비참한 ‘레퀴엠(Requiem)’의 형태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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