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Joker)"
“조커(Joker)는 어떻게 사회적 배제, 정신질환, 그리고 범죄 심리학을 보여주는가?”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 구도가 익숙한 만화 세계에서, 토드 필립스(Todd Phillips)의 영화 '조커(Joker, 2019)'는 선악의 이분법 대신 악명 높은 범죄자 캐릭터의 인간적 고통을 파고든다. 고담시(Gotham City)의 빈곤층에서 외면받고,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아서 플렉(Arthur Fleck)이라는 한 남자에게서 시작된 파괴가 어떻게 ‘조커’라는 상징적 빌런을 탄생시키는지 그려내는 과정은, 결국 이 사회가 가장 약자를 어떻게 방치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사회적 지원과 공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홀로 버려진 이가 폭력의 길로 치닫는 것은 필연일까?
영화 조커가 오늘날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 작품이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정신건강’, 그리고 ‘범죄 행위’ 사이의 연관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사회 심리학적 이론과 반사회적 성격 장애(ASPD) 분석을 통해, 우리는 구조적 불평등과 낙인, 그리고 개인적 취약성이 어떻게 결합해 폭력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서가 겪는 끔찍한 방치와 내면의 혼란은, 결국 범죄가 개인의 ‘악의지’만이 아닌, 외부의 배제와 내부의 절망이 빚어낸 산물임을 보여준다. 조커는 그렇게 단순한 범죄 서사가 아니라, 무관심 속에서 어떻게 광기가 싹트는지를 경고하는 사회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의 무대는 1980년대 뉴욕을 닮은 낡은 고담시.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은, 때론 흔히 볼 수 있는 광대 옷차림으로 생계를 잇는 남루한 남성이다. 그는 원치 않게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신경학적 질환을 앓고 있고(Phillips, 2019), 정부 보조에 힘입어 약을 먹고 겨우 정신적 균형을 잡고 있다. 동시에 병약한 어머니를 부양하며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그의 삶은, 영화 초반부터 모욕과 폭행, 그리고 무시로 가득 차 있다.
서서히 심신이 불안정해지는 중에, 아서는 지하철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이 일이 언론과 시민들 사이에서 부자와 빈자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확산된다.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아서는 대중의 폭력적 분노의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그 자신도 마치 이 분위기에 휩쓸리듯, 점차 약과 정신치료를 끊고, “조커”라는 정체성으로 변모해 간다. 결국 그의 범죄는 생방송 TV 프로그램에서 폭력으로 폭발한다. 조커의 결말은, 사회가 방치한 한 취약한 인물이 어떻게 최악의 살인자로 각인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이 사회가 아서를 지켜줬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사회 구조와 개인의 심리적 한계가 맞물리며 폭력적 결말에 치닫는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데 있다.
낙인(Stigma)과 편견의 힘
사회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은 개인의 자존감을 깎고, 도움 요청을 주저하게 만든다(Link & Phelan, 2001). 영화에서 아서는 ‘괴짜’나 ‘이상한 놈’으로 불리며, 주변인들의 조롱과 억압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된다. 이는 감정적 고통을 심화시키고, 편견과 차별은 기존의 취약성을 더욱 키운다(Corrigan, 2004).
사회적 유대가 끊어진 상태—즉 고립감—은 우울, 불안, 심지어 공격성을 증폭시킬 수 있다(Cacioppo & Hawkley, 2009). 어머니 외에는 친구도, 가족도 없는 아서는 매 순간 불안과 소외를 온몸으로 겪는다. 연구에 의하면, 배척당한 개인은 주목받고자 파괴적 행동을 선택하기도 한다(Twenge et al., 2001). 영화에서 아서의 폭력적 분출이 그가 받은 ‘무시와 조롱’에 대한 극단적 반응임을 엿볼 수 있다.
조커의 고담시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예산 삭감으로 허덕인다. 아서는 불안정한 일자리에, 정신건강 지원마저 끊길 위기에 처하며, 결국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Phillips, 2019). 계층 간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이른바 ‘사회적 상대적 박탈감’은 분노와 폭력을 부추길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Wilkinson & Pickett, 2010). 아서가 느끼는 “나는 쓰레기”라는 감정이 곧 “그래, 세상도 나를 쓰레기로 치니, 나도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분노로 변형되는 셈이다.
아서의 정확한 진단명은 영화에서 명확히 제시되진 않지만, 중증 우울과 외부적 자극에 대한 부적절한 웃음 등 복합적 증상을 보인다. 이런 중복 병리는 꾸준한 심리치료와 약물 관리가 필수다(Kessler et al., 2005). 하지만 영화 속 아서는 띄엄띄엄 사회복지사와 상담할 뿐, 제대로 된 치료나 재활 기회를 얻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곪고 곪아 폭발지점에 다다른다(Seligman, 1995).
연구에 따르면, 조기 개입(Early Intervention)은 정신질환 환자의 예후를 상당히 개선한다. 심리적 지지와 적절한 치료가 있다면 재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Seligman, 1995). 하지만 아서는 이미 사회 구조에서 외면받고, 가족 내 보살핌도 부실하다. 정신건강 지원 예산이 삭감되면서 그의 ‘안전망’은 완전히 해체되고, 자신도 “이젠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라고 단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아서는 대중의 멸시나 주변인의 비아냥을 견디면서, “내가 이상한 존재”라는 자기낙인을 더욱 심화하게 된다(Corrigan & Rao, 2012). 사회적 배제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맞물려,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형성된다. 더 외로워지고, 더 불안해져, 결국 극단적인 선택지—폭력—밖에 안 보이는 상황이 온다.
반사회적 성격장애(ASPD) vs. 반응적 폭력
전통적으로 반사회적 성격장애(ASPD)는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거짓말과 충동성을 보이는 패턴을 지닌다(APA, 2013). 영화 말미의 아서는 이런 기질을 보이지만, **그 출발이 ‘냉혹한 계산’이라기보다 계속되는 괴롭힘과 소외, 심리적 붕괴에서 비롯된 ‘반응적 폭력’**에 가깝다. 정통 ‘사이코패스’와 달리, 아서는 속부터 잔인했다기보다 외부적 압박과 착취, 심지어 환각적·망상적 상태에 몰려 폭발한 면이 크다(Hare, 1999).
사회 인지 이론(Social Cognitive Theory)에 따르면, 사람이 극단적 폭력을 휘두르려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도덕적 탈착(Moral Disengagement)’을 겪게 된다(Bandura, 1999). 아서가 TV쇼 진행자를 살해하는 장면은 그가 기존의 도덕 규범을 완전히 폐기했음을 상징한다(Phillips, 2019). “이 세상은 나를 괴롭히고, 난 복수한다”는 식의 논리가 그를 합리화 상태로 몰고 간 것이다. 사회구조와 언론이 만들어낸 ‘피해자’를 ‘폭도’로 탈바꿈시키는 전형적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Merton, 1938).
아서의 방송 살인은 즉시 도시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미디어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폭력적 행위가 거대하게 보도되면 유사 행동이 모방되거나 폭력의 정당화를 부추길 수 있다(Surette, 2015). 아서가 범죄를 ‘정당화’한 뒤, 고담의 불만 세력이 “광대 복장을 한 아서”를 혁명의 아이콘으로 떠받드는 모습은, 취약 집단이 폭력을 자신들의 해소 수단으로 삼을 위험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서가 가진 ‘발작적 웃음’ 증상은, 사실상 그의 상처를 더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Phillips, 2019). 일반적으로 웃음은 스트레스나 긴장을 풀어주는 긍정적 해소 수단(Freud, 1905)이지만, 여기선 오히려 “이 사람은 통제 불능이다”라는 낙인을 찍는다. 웃어야 할 상황에서가 아니라, 슬프고 두려운 순간에 폭소를 터트리는 모습은 주위의 공포와 경계심을 키워, 더 큰 배제를 가져온다.
전통적으로 광대는 즐거움과 유희를 상징하지만, 조커에서 이 분장은 오히려 사회가 버린 자의 고독과 절망을 시각화한다. “즐거운 분장 뒤엔 울음이 있다”는 오래된 클리셰가 극도로 뒤집히는 셈이다(King, 2016). 뒷배경 음악이나 어두운 조명은, ‘광대의 웃음’이 얼마나 비참한지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코미디가 되어야 할 장면이 비극으로 치닫는, 환상과 현실의 간극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특히 서빙·서비스 직종 등에서는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을 ‘착용’하길 요구한다(Hochschild, 1983). 아서는 가난한 코미디언이자 길거리 광대로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를 팔아야 하지만, 내면은 절망으로 가득하다. 이는 “감정 노동” 개념과 맞닿아 있는데(Wharton, 2009), 겉으로 웃어야 할수록 내면의 고통이 심해질 때, 한계점에서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서의 이야기가 극단적으로 그려낸다.
고담에서는 파업과 예산 삭감, 정치인들의 무책임이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한다(Phillips, 2019). 아서의 우발적 총격이 “부자를 향한 항거”로 왜곡되면서, 대중은 그를 영웅시한다. 집단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에 따르면, 대중이 공통의 적(‘엘리트’)을 향해 모이면 급진적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Tajfel & Turner, 1979). 아서는 본인 의도와 달리 이 폭력적 에너지를 대변하는 ‘광대’가 되어버린다(Wright, 2013).
영화는 군중이 광대 분장을 하고 시위를 일으키는 장면으로, “아서의 범죄가 민중에게 어떻게 전염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이 대중의 불만을 한 지점(조커)에 몰아주어, 이를 폭력의 정당화 아이콘으로 떠받드는 현상과 유사하다(Cohen, 1972). 아서는 사실상 아무 정치적 주장도 없지만, “부유층을 습격한 광대”로 도시가 전면적 폭동을 일으킬 명분을 만들어낸다.
영화 곳곳에 드러나는 분위기는, 도시가 아서 같은 ‘취약자’를 전혀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Hannah-Moffat & O’Malley, 2007). 회사, 이웃, 심지어 복지기관까지 무감하다. 그 결과, 미쳐가는 한 개인이 자생력으로 폭력화되어버리는 악순환을 보여준다. 즉, 구조적·공동체적 무관심이 “폭발”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도화선임을 시사하는 셈이다.
ASPD는 타인의 권리를 무시, 거짓말, 충동성, 죄책감 결여 등이 핵심(APA, 2013). 아서는 결국 충동적이고 폭력적 행동을 보이지만, 원래부터 태생적 잔인함이었다기보다 학대와 방치, 망상이 겹치며 생긴 결과(Phillips, 2019). 순수한 ASPD와 달리, 그는 초기엔 무력감과 우울에 빠져 있었으며, 심한 정신증적 착란도 겪는다(Hare, 1999). 즉, 영화가 그리는 ‘조커’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와는 결이 다른 복합적 사례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이론에 따르면, 거듭된 실패나 학대 경험은 무기력을 낳고, 그 뒤 극단적 상황에서 폭력으로 터질 수 있다(Seligman, 1972; Maier & Seligman, 2016). 아서는 직장에서 잘리고, 주변에 휘둘리고, 자신의 과거조차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절망감이 “파괴를 통한 통제력 회복”으로 변질되는 모습이다.
미디어는 종종 정신질환자를 ‘위험한 범죄자’로 묘사하며 오해를 퍼뜨리곤 한다(Stuart, 2006). 조커 또한 비극적 인물이 어떤 계기로 폭력적 아이콘이 되는 과정을 그려주지만, 동시에 “정말 이가 전부 환자의 탓인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아서는 주위의 무차별적 거부와 멸시에 더해, 방송과 언론의 선정적 보도 속에서 점점 더 자기파괴적 존재가 된다. 이 점은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폭력성’ 이미지가 사회에 뿌리내리는 문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말하는 건, 안정된 거주 환경, 꾸준한 의료 서비스, 응급 심리지원만 있었더라도 아서의 파멸은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저소득층의 정신건강 문제를 방치하면, 중·장기적으로 범죄나 폭력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사회심리학적 통찰이 되풀이 언급된다(Sampson & Laub, 1993). 조커는 사회안전망 부재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아서의 범죄가 촉발한 ‘광대폭동’은 미디어와 대중의 호기심이 범죄를 ‘영웅화’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환기한다. 실제 연구에서도 폭력적 인물을 자극적으로 다룰수록, 모방범죄나 집단폭동을 부추길 가능성이 제기된다(Surette, 2015). 조커는 이 점에서, “부정의를 고발하려는 메시지가, 자칫 새로운 폭력 서사를 부추길 수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영화는 묻는다. “만약 아서가 제대로 된 공감과 지원을 받았다면, 이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신건강 전문가와 빈곤 퇴치 운동가들은 사회의 낙인과 편견을 줄이고, 치료와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Batson, 1991). 누구도 돌보지 않는 도시에서 홀로 신음하다가 ‘악의 대명사’가 된 아서의 이야기는, 공감이 부재할 때 얼마나 쉽게 삶이 일그러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한 남자의 내면을 파고들며, 사회적 약자가 무시와 폭력에 시달릴 때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묻는다. 아서 플렉의 전락 과정은 배제, 낙인, 정신질환, 그리고 안티소셜 폭력이 서로 얽힐 때 어떤 파괴적 시너지가 일어나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동시에 이 작품은 한 개인을 단순 ‘악당’으로 매도하기보다, 정책 실패와 불평등 속에 외로운 영혼이 어떻게 길을 잃는지 그려낸다. 사회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제도적 지원이 끊기는 순간, “도시는 그에 따른 혼돈을 각오해야 한다”는 영화적 선언이자 현실적 경고다. 고담이 아서를 악마로 몰았지만, 그 ‘악마’를 빚어낸 건 시스템 전체였다는 아이러니가 깊은 울림을 준다.
결국 조커는 범죄의 기원을 ‘개인의 타고난 악함’이 아니라, 소외와 절망이 빚어내는 괴물이라 말한다. 그 무관심과 구조적 모순을 방치한다면, 폭력은 언제든 또다른 조커를 낳을 수 있다. 서로를 외면하는 사회,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지 않는 제도, 그리고 정신건강을 방기하는 현실이 겹칠 때, 비극은 이미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잊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