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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스크린을 만날때..._10

"가버나움(Capernaum)"

by 이세현
“가버나움(Capernaum)은 어떻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빈곤, 그리고 회복의 심리를 비추는가?”


왜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들이, 사회가 무시한 상처를 가장 깊이 짊어지는 걸까?


아이들은 흔히 한 사회의 미래, 그 가능성의 결정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로 향하는 걸까? 나딘 라바키(Nadine Labaki)의 가버나움(Capernaum, 2018)은 이러한 질문에 정면으로 마주한다. 주인공 자인(Zain)은 아직 열두 살이지만, 레바논 베이루트 뒷골목의 가장 혹독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는다. 가족의 학대와 거리의 무법, 아무도 보호하지 않는 제도적 공백. 영화는 그의 눈을 통해, “누군가가 돌보지 않는 아이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가?”라는 물음을 강렬히 던진다.


왜 가버나움은 이러한 비참한 빈곤과 가정파탄 속에서도, 전 세계 관객들에게 강렬한 공감과 통찰을 안기는 걸까? 발달심리학과 아동학대 이론의 관점으로 이 작품을 살펴보면, 절대적 돌봄이 부재한 아동이 어떻게 마음속 세계를 형성하고, 또 기막힌 생존 본능을 발휘하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가버나움은 자인의 고통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보여주는 놀라운 회복력(resilience)을 통해,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보호도 못 해주는 세계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도록 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가 드러내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흔적, 빈곤의 심리적 비용, 그리고 가장 가혹한 환경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씨 같은 희망과 회복에 대해 살펴본다.



방치된 아이, 무정한 도시에서 길을 잃다


가버나움은 충격적인 설정으로 시작한다. 열두 살 소년 자인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라바키, 2018). “이런 비참한 삶에 나를 태어나게 한 죄를 묻겠다”는 것. 영화는 거기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인이 살던 참담한 가정환경을 보여준다. 좁은 집에서 폭력과 방임은 일상사이고, 여동생조차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이름의 거래에 내던져진다. 그 모습에 대한 자인의 분노와 절망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그는 거리로 뛰쳐나가, 서류미비자 이주노동자 라힐(Rahil)과 만나게 된다. 라힐의 아기 요나스(Yonas)를 돌봐주면서 자인은 잠시나마 ‘진짜 가족애’를 느낀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속되지 않음이 분명해질 때, 이 소년은 도심의 지옥 같은 현실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


결국 이 지독한 삶은 법정 드라마로 이어진다. 자인은 “부모가 자기 책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고소한다. 이 놀라운 소송은, 어쩌면 모든 방치된 아이들의 내면에 깃든 절규를 대변한다. 가버나움은 단순히 어린 소년의 비극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무력한 존재가 스스로를 지키려 할 때, 세상은 그들에게 어떤 답을 내어놓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뿌리와 파장


애착이론과 안전기반의 붕괴

발달심리학에서, 아동은 주변 보호자에게서 안정된 애착을 형성해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Bowlby, 1969). 하지만 자인의 부모는 생존에 치중하느라 자녀에 대한 보호·정서적 지지가 극도로 부족하다. 공격적이고 산만한 가정환경은, 아이에게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준다(Ainsworth 외, 1978). 그래서 자인은 늘 경계심이 가득하고, 타인에게 쉽게 분노를 드러내는 모습—불안정 애착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을 보인다. 다정함을 받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적대적으로 본다는 점을 영화가 선명히 보여주는 셈이다.


빈곤이 초래하는 ‘독성 스트레스’

끝없이 반복되는 가난과 학대는 아이에게 일종의 ‘독성 스트레스(Toxic Stress)’로 작용한다(Shonkoff 외, 2012). 영양 상태나 교육 기회는 물론이고, 일상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경험이 많으면, 신경학적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잉 분비되어 감정·인지 발달이 크게 왜곡될 수 있다(McEwen, 2000). 자인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생존술을 발휘하고, 조금만 위협을 느껴도 과민반응으로 맞선다. 이는 진화적 생존 메커니즘이지만, 동시에 그의 신체와 정신을 혹독하게 갉아먹는 고통의 근원이다.


학대와 방임의 후폭풍

학대(Abuse)는 폭력이나 성적 착취뿐 아니라 적절한 보호·양육을 하지 않는 방임(Neglect)까지 포함된다(Gilbert 외, 2009). 가버나움에서 자인의 부모는 극도로 힘든 형편이긴 하지만, 그를 노예처럼 부리거나 여동생을 돈 대신 시집보내는 행위로 자녀를 계속 위험에 내몬다. 발달심리학에서는 부모가 보호자가 아니라 가해자·방치자가 되면, 아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뒤틀린다고 본다(Cicchetti & Toth, 1995). 자인의 “부모를 고소”한다는 행동은, 그 절망의 궁극적 표현이며, 동시에 부모가 해주지 못한 안전과 존엄을 스스로 요구하는 처절한 호소다.



빈곤의 심리학: 제도적 실패와 그 대가


‘투명 인간’ 아이들의 그림자

Capernaum은 자인이라는 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공식 서류에도 없는 아이들—즉 국가 시스템에 포착되지 못한 아이들—의 집단적 현실을 보여준다(라바키, 2018). 법적 신분, 교육, 의료가 전무한 상황에서, 어린이는 철저히 방치된다. 생태학적 발달 이론에 따르면(브론펜브레너, 1998), 아동 발달은 가정·학교·지역사회가 상호작용하며 이뤄지는데, 여기선 모든 층위가 붕괴 상태다. 결과적으로 자인은 기본적 안전망도 없이 거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의 그림자

빈곤이 고착화된 환경에서, 아이들은 반복적으로 자원 획득과 도움 요청을 거절당한다(셀리그만, 1972).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무력감이 마음 깊이 뿌리내릴 수 있다. 자인이 어른들에게 여러 번 호소하지만 번번이 외면당하는 장면들은, 아이가 점차 주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인이 완전히 무너지는 대신, 되레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발버둥치는 장면을 통해 “완벽한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 아이의 생명력을 부각한다.


성차별 구조 안에서의 더 심각한 폭력

여동생의 ‘어린 신부’ 사건은 극빈층 가정 내에서 특히 여성 아동이 어떻게 거래되고 착취되는지를 일깨운다. 가난과 가부장제가 결합해 아이들의 미래가 부모의 생계수단으로 전락하는 비극(UNICEF, 2014). 이는 자인이 더욱 강한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가버나움은, 이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소녀·여성에게 가해지는 2차적 학대를 결코 외면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극한 상황에서 돋보이는 대처와 회복력


비공식 생존술과 거리의 경제

자인은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등 불법 아르바이트를 하고, 라힐이 떠난 뒤엔 요나스를 돌보면서 ‘어른 노릇’을 한다. 스트레스 대처 이론(Lazarus & Folkman, 1984)에 의하면, 사람이 통제 가능한 부분이라도 개선하려 애쓰는 ‘문제중심 대처’가 역경을 견디는 데 유리하다. 자인이 철저한 무력감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에서 사소한 돈벌이, 식량 확보, 아이 돌보기를 시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살아남겠다”는 작지만 굳센 의지다(Rutter, 2012).


관계가 주는 작은 쉼표

가버나움은 라힐과 자인이 서로 감싸주고, 또 요나스를 돌보는 과정을 통해, 서로 ‘대리 가족’이 되어주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애착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은 생존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새로운 안전기지를 찾을 수도 있다(Van IJzendoorn & Sagi-Schwartz, 2008). 비록 라힐도 자신이 살아가기 힘든 처지지만, 자인에게 방 한 칸이라도 내주는 이 작은 ‘서로 의지’가 둘 모두에게 정서적 위안을 준다. 회복탄력성의 일부는 이런 상호 지원적 유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영화는 가슴 시리도록 강조한다.


절망 속에서도 솟아오른 ‘희망의 외침’

결정적으로, 자인의 “부모 고소”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응적 회복력(reactive resilience)’—절망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모습(Masten, 2001). 그는 세상에 외친다. “당신들은 나를 이 세상에 내놓았지만, 보호도 보살핌도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이 행위는 우스워 보일지라도, 아동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분증 사진을 찍을 때 보이는 자인의 굳은 표정은, 아직 한 치 앞도 모를 불안한 미래이지만, 그가 최소한 ‘존재를 인정받는 아이’로 발걸음을 뗐다는 뜻이기도 하다.



감정의 핵심: 죄책감, 분노, 그리고 애정 결핍


‘조숙한 어른’이 돼버린 어린아이

자인은 종종 어른보다 더 노련하게 일하고 언쟁한다. 이는 “아동의 성인화(adultification)”로 불리는 현상(Burton, 2007). 가족이 기능하지 못하자, 아이가 안전과 생존을 책임져야 하기에 본래 자기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할 기회조차 박탈된다. 심리적으로는, 이로 인해 혼란과 분노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웃어야 할 시기에 아기가 되어줄 틈도 없이, 현실이 그를 ‘작은 어른’으로 몰아간다.


분노로 표현되는 항변

종종 자인이 격렬하게 폭언·폭행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전문가들이 “학대나 방임을 겪은 아이들이 보이는 전형적 자기방어”라고 지적하는 부분과 맞닿는다(Garbarino, 1995). 폭발적인 분노는 종종 ‘난 상처받지 않아’라고 선언하는 방패막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자인이 가족에게, 혹은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울분은, 사실은 “어째서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았나?”라는 반항적 호소. 그 밑바탕에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처연한 갈망이 깔려 있다(Perry & Szalavitz, 2017).


어린 심장의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

그럼에도 자인은 곳곳에서 애정을 갈망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요나스를 돌볼 때, 본능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중심 치료(Rogers, 1961) 관점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이 아이에게는 필수적인데, 그런 경험이 전무했던 자인은 더욱 유약한 속마음을 숨기려 애쓴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 소년의 거친 말투 속에도 “누군가 나를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길, 인정해주길” 바라는 내면을 감지하게 되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사회적 경고: 아이들은 구조적 실패의 희생자


슬럼과 비공식 거주지의 ‘보이지 않는 아이들’

영화는 자인의 가족만의 불행이 아니라,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아이들의 그림자를 비춘다(라바키, 2018). 어쩌면 이들은 국가의 인구 통계에도 잡히지 않고, 어떤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거리에서 살아간다. 생태학적 발달 관점(브론펜브레너, 1998)에 따르면, 아이는 가족·학교·지역사회·문화라는 다층의 보호망에서 자라야 하는데, 가버나움 속 현실은 모든 층이 붕괴되어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범죄나 착취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무기력한 행정과 법적 사각지대

부모를 고소하는 자인의 사건은, 실제로도 아동 보호 제도나 법률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라바키, 2018). 사회 심리학적 측면에서 공공정책이 빈곤가정 아동의 건강·교육·복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관료주의와 자원 부족, 차별 등이 겹쳐 진정한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아이가 직접 “이건 잘못됐어요!”라고 외치지 않으면, 세상은 그들의 절규를 듣지 않는다. 이는 모순이자 비극이며, 가버나움이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분노와 연대: 움직임의 가능성

영화 전반이 지향하는 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동시에 “이대로 괜찮을 수 없다”는 자각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공감은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심리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Kidd & Castano, 2013). 가버나움이 던지는 건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절박하고 시급한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윤리적·정서적 딜레마: 아이의 자발성과 생존 전략


극한에서 살아남는 ‘주체적 아이’

영화 속 자인은 신체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아이지만, 음식 마련, 금전 거래, 심지어 서류 위조자와 협상까지 해내며 살아간다(라바키, 2018). 사회학에서 ‘거리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성인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다고 한다(Aptekar, 1994). 자인은 분명히 어른다운 재치를 보이지만, 동시에 심리적으로 여전히 “부모의 돌봄”을 갈망하는 어린 존재라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부모도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자인이 고소하는 부모들도 사실 가난과 무지, 전통적 관습에 갇혀 있다. 연구에 따르면, 빈곤이 극단화되면 부모 역시 자녀 돌봄 능력을 크게 잃거나 폭력·방임적 태도를 보이기 쉽다(Cicchetti & Toth, 1995). 이처럼, “부모가 정말 악의적인 가해자였는가, 아니면 체제와 무지의 희생자였나”라는 딜레마가 커다란 질문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이를 학대하거나 결혼으로 ‘팔아넘기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가버나움은 부모의 연민과 비난을 동시에 자아내며, 관객에게 구조적 문제의 복합성을 직시하게 만든다.


공감과 정의의 교차점

결국, 자인은 부모에게 벌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아이로서의 복잡한 감정—사랑과 증오, 분노와 그리움—이 혼재한다. 도덕발달 이론(Turiel, 1983)에 따르면, 아이는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만, 여전히 안전과 보살핌을 찾아 헤맨다. 폭력적 부모를 처벌하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가족’이라는 이름에 묶여 있다는 아이러니. 가버나움은 이처럼 ‘정의’와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아이의 내면을 통해, 이 문제가 단지 법이나 윤리의 영역을 넘어, 따뜻한 인간적 해결을 필요로 한다고 시사한다.



회복의 단서: 작은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소송 자체가 주는 목소리

영화가 재판 장면으로 구성된 것은, 아이들의 절규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현실을 뒤집어보려는 시도다(라바키, 2018). 이는 실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어린이가 “나는 이렇게 살기 싫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미가 있다. 학계에서도, 아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가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처를 극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본다(Hart 외, 1997). 자인의 재판은 비록 상징적이지만, 그가 결코 ‘침묵하는 희생자’로 남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 깃든 불씨

가버나움의 결말은 “자인이 임시 신분증을 찍으며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모습”으로 압축된다. 처음으로 나라가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장면(라바키, 2018). 그 얼굴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지만, 동시에 뭔가 새로운 국면이 열릴 수 있으리란 작은 여운도 깃들어 있다. 회복탄력성 연구(Rutter, 2012)에 따르면, 단 한 번의 작은 제도적 개입이나 지지자 출현이 아동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자인의 시선은, 아직 벼랑 끝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관객에게 남는 과제

영화가 끝날 때쯤 관객은 마냥 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이런 아이들이 세상에 이렇게 많을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을까?’**라는 불편한 질문을 마주한다. 이것이 바로 가버나움이 일으키고자 하는 윤리적·감정적 반향이다. 제도와 정책, 시민의식이 결합해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러나 그 실행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현실을 영화가 고발하며, 감정의 여운을 통해 실천적 변화를 호소하는 형태로 결론짓는다.



어린 시절과 트라우마, 그리고 존엄을 향한 몸부림


'가버나움(Capernaum)'은 극빈 속에서 방치된 아이들이 겪는 극단적 불행을 생생히 그려냄으로써, 전 세계 수많은 ‘자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발달심리와 아동학대 연구 관점에서 보면, 이는 보호·애정이 결핍된 아이가 어떻게 비정상적 성장경로를 밟게 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학대·방임, 극심한 빈곤이 합쳐진 상황에서 아이는 일찍부터 성인 역할을 떠맡고, 폭발적인 분노와 함께 때론 놀라운 자구력도 보인다.


그러나 가버나움이 단지 비극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그럼에도 아이들이 보여주는 연민, 사랑, 그리고 회복탄력성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자인이 라힐과 함께 아기를 돌보며 일시적으로 ‘가족’을 이루는 장면, 재판장에서 부모를 고소하겠다고 외치는 장면 등은, 이 세상 최악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아이는 힘겹게나마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관객은 그 울분의 외침에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가버나움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이들은 부모·사회·국가가 지켜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대답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린 시절은 상처로 얼룩지고, 그 이후의 인생 역시 깊은 상흔을 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바닥까지 몰렸어도, 작은 가능성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눈빛 속에 존재하는 근본적 생명력과 희망, 그것이 바로 가버나움이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적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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