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엘라(Cruella)"
“크루엘라(Cruella)는 정체성과 반항, 그리고 개인의 변화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기존 질서’를 깨부수고 싶어 하는 충동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그 저항의 몸부림이 과연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길일까, 아니면 유년기의 반짝 스쳐가는 일탈에 불과할까? 디즈니의 크루엘라(Cruella, 2021)는 고전적인 악역의 탄생기를 근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어떻게 권위에 맞서는지를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어린 ‘에스텔라(Estella)’—훗날 ‘크루엘라(Cruella, 엠마 스톤 분)’로 불리게 되는 인물—가 런던 패션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재능, 가문(heritage), 그리고 제도에 대한 불만 사이를 오가며, 관습에 균열을 일으키는 과정을 담는다.
도대체 어떻게 크루엘라는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강한 공감을 이끌어내며, 정체성 형성과 사회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걸까? 이 글에서는 정체성 개발과 사회화 이론의 관점에서, 한때 단순 악역으로만 그려지던 크루엘라가 어떻게 복합적인 ‘자기 발견’ 이야기로 재탄생했는지 살펴본다. 크루엘라는 선악의 단순 대립을 넘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반항이 어떻게 해방감을 주는 동시에 얼마나 위험한 경계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영화가 조명하는 내면의 갈등—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자아—은, 결국 비전통적인 ‘나’를 수용할 때 맛볼 수 있는 자유와 위험을 함께 드러낸다.
영화는 에스텔라가 가진 고독한 유년기를 펼쳐 보인다—특이한 머리색, 학교에서 왕따가 되는 기이함, 그리고 어느 날 벌어진 비극적 사건(길레스피, 2021). 그녀는 거리에서 생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무리와 함께하며, 착하고 창의적인 ‘에스텔라’라는 얼굴 뒤에, “크루엘라”라 불리는 대담하고 무모한 또 다른 자아를 감춘다. 가정이 주는 온전한 보호 대신, 에스텔라는 늘 불량스러운 기지와 기묘한 재능에 의존해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런던의 화려한 패션계와 맞닥뜨릴수록, 에스텔라는 ‘크루엘라’라는 이름이 점차 자신에게 맞는 본모습임을 자각한다. 유산(heritage)에 대한 충격적 진실이 밝혀지자, 복수심과 야망이 뒤엉킨 크루엘라의 분노는 폭발적인 형태를 취한다. 복잡한 개인사와 시대의 억압이 결합하여, 결국 우리가 아는 그 ‘크루엘라’라는 악명 높은 인물이 탄생한다. 영화는 이것을 단순 복수나 성공담으로 그치지 않고, “개인적 정의감과 분노가 만났을 때 어떤 대담한 면모를 일깨우는가”라는 정체성 이슈로 풀어낸다. 크루엘라는 에스텔라가 살아온 길거리 생활과 패션에 대한 뜨거운 열망, 그리고 세상이 가하는 억압 간의 치열한 상호작용을 비추며, 그 안에서 자아 형성이 어떻게 충돌하고 또 완성되는지 이야기한다.
에릭슨(1968)에 따르면, 청소년기와 초년 성인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맡을 ‘사회적 역할’과 내면의 자아가 부딪히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크루엘라에서 에스텔라는 이 혼돈 상태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본래 ‘착한’ 에스텔라로 살고 싶지만, 현실의 차별과 거친 환경이 그녀 안의 거친 면모—즉 ‘크루엘라’를 불러낸다. 에릭슨 이론에서, 이 시기 성공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면 자기 내부의 욕구와 사회적 기대를 조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한데, 영화 속 에스텔라는 이런 조화를 찾지 못한 채, 두 개의 자아(에스텔라와 크루엘라)를 왔다 갔다 한다. 이것을 영화는 ‘선악 구도’로 단순화하기보다, 돌봄과 분노라는 양면의 심리적 충돌로 그려낸다.
마샤(Marcia, 1966)는 에릭슨 이론을 확장해 정체성 지위를 네 가지(유예·유실·유예·성취)로 분류했다. 영화에서 에스텔라는 일종의 ‘유예(moratorium)’ 상태에 있는 듯 보인다. 패션 디자이너, 사기꾼, 복수자 등 다채로운 역할을 시도하지만, 확고히 어느 하나에 전념하지 못한다. 동시에, 주변 환경(패션사회의 치열함, 귀족적 권력자 등)이 그녀의 반항을 부추긴다. 크루엘라는 반항이 단지 ‘비행’이 아니라, 유예 상태에서 정체성을 모색하는 전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후에 ‘크루엘라’라는 정체성을 선택함으로써, 어느 정도 결단에 이르지만, 그 과정 자체가 모색의 혼란을 생생히 드러낸다.
세상을 거스르는 행위가 때론 우리 내면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Adams & Marshall, 1996). 크루엘라에서, 에스텔라는 본능적으로 규범을 깨뜨리면서 자신의 독창적 재능과 의지를 발견한다. 거리에 그래피티를 남기고, 터무니없는 패션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등, 이 모든 ‘반항’은 단순 범죄가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 표현하는 시도다(Patterson, 2013). 영화는 반항이 일탈로 치닫는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 자체가 자유와 창의성을 찾기 위한 필수 과정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동 발달에서, 또래와 주변 성인의 말투, 태도가 아이의 가치관과 행동을 형성한다(Harris, 1995). 에스텔라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재스퍼(Jasper)와 호레스(Horace)는 절도와 꾀부리는 생존술을 알려주고, 이를 일상화한다. 동시에, 패션계의 절대 강자인 남작 부인(Baroness)은 에스텔라가 갈망하던 화려함과 잔혹함을 상징하며, “성공하려면 무자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내보인다. 크루엘라는, 주변 환경이 얼마나 쉽게 한 소녀를 ‘과감하고 치밀한 괴짜’로 만드는지 보여주는데, 이는 반항을 보다 극단적으로 치닫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자극’ 역할을 한다(Bandura, 1977).
에스텔라가 안정된 가정이나 제도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범죄를 일삼는 이유는, 경제적·사회적으로 배제당한 어린 시절에 기인한다(van der Horst, 2011). 패션계에서도 ‘귀족’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그녀는 정통 경로가 아닌 기발한 쇼크 전술로 주목을 끌어야만 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가난은 합법적 성공 루트를 차단해, 더 반사회적 방식의 성공 추구를 유도한다(Agnew, 1992). 결국, 에스텔라의 파격적 복수와 도발은, 한편으론 “체제가 나를 무시했으니 나도 규칙을 무시하겠다”라는 메시지를 외치는 것이다.
남작 부인은 냉혹한 프로페셔널리즘, 재스퍼와 호레스는 헌신적 동료애를 보여준다. 에스텔라(혹은 크루엘라)는 이 상충하는 가치들을 뒤섞어, 잔인하면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모순적 존재가 된다. 사회화 이론에서는, 사람이 여러 집단에서 상이한 규범을 학습할 때, 정체성 충돌이 커진다고 한다(Bandura, 1977). 크루엘라는 결국 이 충돌로부터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해내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복합적 캐릭터를 완성한다.
처음부터 에스텔라는 공격적 성향을 지녔으나, 나름 순한 태도로 억누르려 애쓴다. 영화는 이 점을 인간의 ‘그림자(shadow) 자아’라는 융(Jung, 1959)의 관념과 연결한다—우리가 기피하거나 억제해온 본능적 자아가, 특정 자극 아래 표면으로 폭발적으로 튀어나온다. 크루엘라에서는 이 그림자 자아가 단순히 악의가 아니라, 용기·자기주장·창의적 과감함을 담고 있기에, “어느 쪽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에스텔라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잔인한 복수심도 숨기지 않는다(Festinger, 1957). 사교 모임에선 예의 바르고 친절한 ‘에스텔라’, 그러나 밤엔 ‘크루엘라’가 되어 광란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이중생활은, 본인에게도 큰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이 “크루엘라 방식”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고, 그녀에게 영향력을 선사한다. 영화는 이중인격이 악으로만 치닫지 않고, 자립심을 북돋우는 요소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그 대가로 주변인들과 멀어진다는 진실을 담담히 그려낸다.
결말부에서 에스텔라는 ‘크루엘라’라는 이름을 전면화하며, 부모와 얽힌 처절한 비밀을 세상에 폭로한다(길레스피, 2021). 관습적 관점에선, 여기가 “정체성 통합”의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선’이든 ‘악’이든 하나의 통합된 자아를 세우는 것이 정체성 성취(Marcia, 1966). 그러나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정말 에스텔라 안의 따뜻함은 죽었나, 아니면 여전히 크루엘라 내부 어딘가에 살아있는가?”이다. 불완전하게나마 자기 양면을 인정하고, 그 사이 경계를 타며 살아가는 ‘크루엘라’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내적 갈등을 품은 채 다만 새로운 문을 열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에스텔라의 유년기 외상은—어머니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사건—그녀 안에 방대한 아픔과 분노를 쌓아놓는다(Tedeschi & Calhoun, 2004). 그러나 그녀는 이를 소극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창작열과 투지가 가득한 ‘크루엘라’ 스타일로 승화시킨다. 동시에, 이 성장은 순수치 못한 복수심에 물들어있기도 하다(Janoff-Bulman, 1992). 그래서 크루엘라의 “성장”은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상처에서 비롯된 힘이 사람을 어떻게 능동적으로도, 위험하게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중적 서사다.
한 번 ‘크루엘라’가 등장해 패션계에 충격을 주자, 에스텔라는 무대 뒤에서 점점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키운다(Bandura, 1977). 공공장소에서 벌이는 퍼포먼스가 성공을 거둘수록,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은 올라가고, 행동은 더 대담해진다. 그러나 자아도취에 빠질 위험도 생긴다. 크루엘라는 “성공”을 매개로 한 효능감이, 타인을 해치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그녀가 점점 남작 부인과 닮아가는 것도 이 탓이다.
처음엔 에스텔라는 흑백 머리카락을 숨기려 했지만, 최종적으론 이것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는다. 이는 자기에게 내재된 독특함, 혹은 어두운 면조차 온전히 수용해버린다는 상징(Goffman, 1959). 패션은 곧 몸과 정신을 연결하는 표현 수단이며, 마침내 그는 ‘크루엘라’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세운다. 이는 과거 에스텔라가 부정하던 면을 마침내 품어내면서, 더 이상 가면이 아닌 본모습을 대중에게 드러낸 결정적 장면이다.
거리 생활을 함께해온 재스퍼와 호레스는, 에스텔라가 ‘크루엘라’로 변모하며 달라지는 권력관계에 혼란을 느낀다(Forsyth, 2019). 세 사람의 유대는 사기의 동업자라는 비정상적 틀에서 시작했지만, 그 안에는 가족 같은 끈끈함이 있었다. 그런데 크루엘라가 “내가 왕이다” 식으로 군림하려 들자,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이탈할 뻔한다. 영화는 이렇게, 개인이 목표를 위해 독단적으로 변할 때, 소중한 동반자와 단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작 부인은 크루엘라에게 세계적 패션 감각과 냉정함을 동시에 가르친다. 반면 그녀는 적이자 롤모델 같은 양면적 존재다. 심리학적으로, 우리가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상대에게서 특징을 흡수해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Bandura, 1977). 영화 속 크루엘라가 남작 부인의 전법(잔인함, 홍보 전략)을 참고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건, “내가 미워했던 대상을 닮아가는 역설”을 극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정체성 변화는 종종 공감이나 안정감을 주던 사람들과의 단절을 수반한다(Tajfel & Turner, 1979). ‘크루엘라’가 될수록, 에스텔라는 주변 동료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차가운 태도를 취한다. 집단관계 연구에서, 팀 내 권력자 중심이 강해지면 신뢰와 소통이 균열될 수 있다고 한다(Forsyth, 2019). 크루엘라도 바로 그 위기를 보여주면서, “내가 원하던 힘과 독립을 쥐면, 그간 나를 지탱해주던 ‘정’이 손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씁쓸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크루엘라의 기발한 의상들은 반항과 창조가 만나 탄생한 ‘정체성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Barnard, 2014). 각각의 파격적 디자인은 남작 부인의 행사들을 무너뜨리는 반체제 퍼포먼스인 동시에, 에스텔라의 내면에 있던 자유, 분노, 열광적 에너지를 시각화한다. 즉 패션은 단순한 치장이 아닌, “내가 누구인지”를 외부에 드러내는 욕구를 대담히 실현하는 도구다(Wicklund & Gollwitzer, 1982).
화려한 드레스와 쇼킹한 퍼포먼스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을수록, 크루엘라의 내면은 점차 ‘이 무대가 끝난 후 난 누구지?’라는 고민을 더한다(Goffman, 1959). “겉치장”은 일종의 자기표현이자 연극적 장치이지만, 그것이 너무 강력하다 보면, 실제 내면과 분리되는 위험이 생긴다. 영화는 크루엘라가 혼자 있을 때, 여전히 ‘에스텔라’의 따뜻함을 온전히 지운 건 아니며, 이 간극에서 생기는 혼란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적 지위가 없던 에스텔라가, ‘크루엘라’라는 충격적 아우라로 주목받게 되면서, 가시성(visibility)이 곧 권력임을 깨닫게 된다(Tajfel & Turner, 1979). 과거엔 거리의 무명인이었던 아이가 이제는 이벤트의 중심,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남작 부인조차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명성이 높아질수록 ‘에스텔라’의 온기는 사라지고, ‘크루엘라’가 지닌 냉혹함이 더 뚜렷해지는 역설적 장면도 그린다. 다시 말해, 힘과 자유를 얻는 동시에, “내가 미워하던 권력자와 닮아가는 것 아닌가?”라는 딜레마를 남긴다.
크루엘라가 자신의 친모(남작 부인)와 관련된 비극적 진실을 깨닫게 되며, 본인 뿌리에 숨겨진 잔혹성을 대면한다. 발달심리 관점에서, 가족적 상처와 화해하거나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체성 구축의 핵심(McAdams, 2001). 크루엘라는 결국 복수와 더불어, “난 이 집안의 희생양이 아니라, 주인이 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는 단지 원한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틀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겠다는 선언으로도 읽힌다.
영화가 끝나며 에스텔라는 완전히 ‘크루엘라’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한다(길레스피, 2021). 이 선택은 한편으로는 “억눌린 나”를 받아들인 자아실현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에스텔라의 따뜻함”이 희미해졌다는 걸 암시한다. 정체성 이론(Marcia, 1966)에서는 이상적으로 다양한 면을 조화롭게 통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크루엘라 결말은 그 조화가 완성되지 못한 듯 보인다. 우리는 그녀가 정말 행복할지, 아니면 결국 남작 부인처럼 잔혹한 권력자로 전락할지 모호함을 느낀다.
반항은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주변과의 충돌을 야기하며 죄책감을 안겨줄 수 있다. 영화는 크루엘라가 “차별과 학대에 맞선 정당한 반란”을 일으키는 듯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처입히는 모습을 그려낸다. 심리학적으로, 자기 파괴적 분노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용서와 주변에 대한 책임감’이 필요한데, 크루엘라는 이 지점에서 명확한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번뜩이게 웃으며 새 여정을 시작하는 결말은, 우리의 상상으로 하여금 “이후의 도덕적·정서적 균형은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게 한다.
크루엘라(Cruella)는, 단순히 101마리 달마시안의 악역 탄생담을 새로이 꾸민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억눌린 자아와 사회 규범에 대한 도발이 만나, 어떻게 한 인물이 본래 지녔던 가능성과 위험을 함께 꽃피우는지를 그린 강렬한 서사다. 발달심리학과 사회심리학 관점에서, 이 작품은 반항적 행위가 때론 자기를 찾는 필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그 반항이 언제든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내면의 순수를 희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집어낸다.
영화는 극적인 패션쇼와 계략, 그리고 귀족적 악당과의 대립을 통해, 반항이 대중의 환호와 두려움을 동시에 어떻게 끌어내는지를 시각화한다. 그러나 눈부신 성취 뒤에는 사랑하는 이들로부터의 이탈, 스스로도 떨쳐내지 못한 트라우마의 기억 등이 교차한다. 결국, 크루엘라가 남기는 메시지는 간단치 않다: 진정한 나로 거듭난다는 건, 내 안의 어두운 면마저 수용해야 하는 모험이기에, 그 과정에서 용기와 고독을 동시에 짊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에스텔라’라는 순수한 측면과, ‘크루엘라’라는 과감한 측면이 서로를 희생해야만 완성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는다. 이 불완전성이 오히려 현실적이다—우리는 모두 내면의 반항아와 순응자를 동시에 안고 살아가며, 어느 쪽을 주도적으로 발휘하느냐가 삶의 궤적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완벽히 반짝이는 새 출발 속에서도, 크루엘라의 눈빛엔 슬쩍 번지는 쓸쓸함이 숨겨져 있다. 그 아릿한 모호함이야말로, ‘내가 되기 위해 세상과 부딪힌다’는 것의 참된 대가임을 역설적으로 밝혀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