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이 스크린을 만날때..._6

"이터널 선샤인"

by 이세현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기억과 사랑,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가장 소중한 기억’을 지우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는 달콤한 순간, 함께한 추억, 깊은 감정적 교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이별로 인한 상처는 가끔 너무 쓰라려서, 잊어버리고만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과연 우리에게 아픈 추억을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유로 가는 길일까?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의 '이터널 선샤인(2004)'은 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조엘(짐 캐리 분)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이란 연인이 기억 지우기 기술을 통해 관계의 흔적을 없애려 하면서, 영화는 어느새 “내가 누군지”를 결정하는 기억의 본질, 그리고 사랑과 애착이 주는 끈끈함에 대해 묻는다.


어째서 이 기괴한 ‘기억 삭제 로맨스’가 우리의 사랑과 애착, 그리고 유동적인 기억의 세계와 깊이 맞닿아 있을까? ‘기억의 구성성(Reconstructive Memory)’과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중심으로 이 영화를 살펴보면, 이터널 선샤인이 보여주는 여러 에피소드가 단순히 슬프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넘어, 우리 정체성과 기억, 그리고 다시금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는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조명함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기억이 가진 가변성, 애착 관계가 지닌 힘, 그리고 애틋하면서도 쓰린 사랑이 어떻게 회복 혹은 재시작될 수 있는지를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줄거리 한눈에 보기: 지워진 사랑, 그러나 다시 찾은 사랑


이 영화는 독특한 과학적 설정을 배경으로 한다. 조엘은 어느 날, 여전히 사랑하던 클레멘타인이 ‘라쿠나(Lacuna) 주식회사’의 기억 삭제 시술을 통해 자신과의 추억을 모두 없앤 사실을 알게 된다(Gondry, 2004). 충격과 분노, 그리고 상실감에 사로잡힌 조엘은 똑같은 절차를 밟아 클레멘타인과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너를 지우면 내 고통도 사라질 테지”라는 기대를 안은 채.


하지만 시술이 진행되면서, 관객은 조엘의 무의식 속 여행을 함께 따라간다. 처음에는 “잊어야지”라고 억지로 마음먹었던 조엘이, 소중했던 순간들을 다시 만나게 되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억들을 “도망쳐 보존하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다. 한편 라쿠나 회사 직원들이 벌이는 치정극과 윤리적 딜레마도 흥미진진하다. 결국 시술이 끝난 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 “처음” 만난 것처럼 느끼면서도,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또다시 관계를 시작한다. 기억은 사라졌어도 감정의 흔적은 남았다는 듯이.



기억의 재구성: 불안정한 아카이브


기억은 사실 ‘녹화된 동영상’이 아니다

심리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기억은 결코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Bartlett, 1932). 대신 기억은 끊임없이 편집되고, 다시 불려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재구성(Reconstruction)”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 조엘의 기억도 시술 과정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거나 뒤섞이며, 구체적인 이미지가 섞이고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정신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기억의 유동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Loftus, 1979; Schacter, 1996).


감정적으로 중요한 기억은 더욱 끈질기다

그렇다면 모든 기억이 똑같이 잘 사라질까? 아니면, 슬프거나 기쁜, 즉 감정적으로 강렬한 기억일수록 더 오래 남을까? 실제로 정서적 자극이 높은 기억일수록 각인될 가능성이 큰데, 레두(LeDoux, 1996)나 카힐과 맥거(Cahill & McGaugh, 1998)의 연구를 보면, 감정적 각성이 높은 사건은 뇌에서 더 강력히 저장된다. 영화에서 조엘이 “아, 제발 이 순간만큼은 지우지 마!” 하며 몸부림치는 건, 그 감정적 농도가 진한 추억일수록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과 기억은 동전의 양면

기억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기능을 넘어, “내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다(Conway & Pleydell-Pearce, 2000). 이터널 선샤인은 이 점을 매우 극적으로 그려낸다.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지워지면서, 조엘은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정서·사건의 일부를 잃고, 결국 “내가 왜 이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혼란에 빠진다. 자서전적 기억이란 개인의 시간적 연속성을 만들어주는 근간이다(Fivush, 2011). 따라서 소중한 추억을 지우는 행위는,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 ‘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스스로 지워버리는 꼴이 된다.



애착 이론: 사랑을 지우려 해도 왜 쉽지 않은가?


감정적 유대의 위력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은 인간이 안정과 정서적 지지를 얻기 위해 깊이 결속한다는 걸 강조한다(Bowlby, 1969).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렸음에도, 낯선 상태에서조차 다시금 끌리게 된다. 이는 “의식적 스토리”가 사라져도 감정적 토대, 즉 애착의 흔적은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에인스워스(Ainsworth, 1978)가 밝혔듯 유아기 애착이 이후 삶에 큰 영향을 주듯, 어른 사이에서도 형성된 깊은 애착은 분리되어도 지우기 쉽지 않은 흔적을 남긴다.


불안형? 회피형? 아니면…?

우리가 애착 스타일(attachment style)을 이야기할 때, 불안형, 회피형, 안전형 등이 떠오른다(Hazan & Shaver, 1987). 영화 속에서, 즉흥적이고 애정 확인을 갈구하는 클레멘타인은 불안·집착형 애착을 살짝 띠는 듯하고, 조엘은 상대적으로 마음을 닫고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회피형 면모가 엿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분명한 애정이 있었고, 일시적으로나마 ‘안전 기지(Secure Base)’ 역할을 서로 해주기도 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Mikulincer & Shaver, 2007). 아이러니하게도, “난 너를 지울래”라고 외친 뒤에야 그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는 과정이 애착 이론의 역설적 단면을 그려낸다.


인위적인 이별이 주는 심리적 충격

볼비(Bowlby, 1980)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분리가 애도 과정을 야기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이별’은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과정 중에도, 그 상실감과 애증을 고스란히 느끼며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에게 매달린다. 이는 실제로든, 인위적으로든 애착 대상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겪는 고통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의 흥망성쇠, 그리고 기억의 선택적 편집


황홀했던 시절과 생채기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는 처음엔 반짝반짝 빛나는 낭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시간이 흐르며 갈등과 싸움이 쌓인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보여주는 과감한 데이트나 장난스러운 순간들은 참 예뻐 보이지만, 결국 “일상”이 되면서 통신 장애, 성격 차이 등이 커지게 된다. 러스볼트(Rusbult, 1980)의 이론에 따르면, 부정적 상호작용이 누적될수록 상대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결국 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 기억을 삭제해버리면 이 교훈들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 문제다.


고통의 편집 vs. 배움의 상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합리화를 위해 기억을 미화하거나, 때로 고통스러운 부분을 없애려 하는 ‘서사 수정’ 욕구를 지닌다(Baumeister & Newman, 1994). 그런데 여기서는 아예 의학적 방법으로 고통을 지우려 든다. 문제는 아픔을 없앤다는 게, 동시에 성장을 위한 씨앗을 없애버린다는 사실(Levine, 2010).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인간적인 성찰과 회복을 거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열기도 한다. 실패의 기억까지 날려버리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확률만 높아진다.


‘용서’라는 엔딩을 거부하다

영화 속에서 조엘은 시술 중, 어린 시절로 회귀하거나 황당한 장면에 클레멘타인을 감춰둠으로써, 기억이 완전히 소거되는 걸 막으려 한다. 이는 강제로 진행되는 이별이나 배신에 대해 “용서나 화해” 같은 과정 없이 바로 지워버리는 선택이 과연 옳은가를 묻는다(Worthington, 2003).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길 때, 시간을 들여 서로 용서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관계 회복의 중요한 단계인데, 이 영화 속 세계관에선 그런 과정이 “기억 삭제”로 생략되어 버리는 셈이다.



기억 지우기의 윤리적 딜레마


의료기술의 부작용: 충분히 검토되었나?

라쿠나 주식회사의 시술은 ‘기억을 착착 골라내는’ 기술인데, 과연 이런 시술을 받는 이들이 그 후폭풍에 대해 충분히 알고 동의하는 걸까? 실제로 기억 수정이나 중화 기법에 대한 현대 연구(Kindt, 2009)에서도, 강렬한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아예 통째로 지우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영화에서도 ‘사랑의 추억까지 통째로 사라지면 정체성에도 구멍이 생긴다’는 점이 강조되어, “감정적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이 시술 선택이 합리적 의사결정이었나?” 하는 의문을 던진다(Slovic et al., 2002).


관계 맥락에서의 책임감

사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시술받았고, 이에 상처받은 조엘도 “나도 지워!”라고 똑같이 해버린다. 이건 합리적 판단이라기보단 ‘분노와 슬픔의 즉흥적 선택’에 가깝다. 만약 당시 정신적 안정 상태가 아니었다면, 의료진의 윤리적 책임도 적지 않다. 상처받은 이에게 “네 기억 지워드립니다!”라는 달콤한 광고는, 문제 해결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서로 대화하고 해결할 기회” 자체를 박탈하기도 한다.


‘기억할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가?

철학자 리쾨르(Ricoeur, 2004)는 기억이 인격과 도덕적 주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이라 주장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성찰해야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에서 조엘이 마지막까지 애써서 클레멘타인과의 몇몇 장면을 지키려는 것도, 본능적으로 이것이 “나의 일부”임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무리 힘든 기억이라 해도 함부로 지워선 안 된다는 메시지가, ‘잊지 못하겠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투를 통해 전해진다.



과거 돌아보기가 주는 자기발견


조엘의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

시술이 진행되는 동안, 조엘의 뇌는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지우는 걸 사사건건 방해하고자 애쓴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없애고 싶다” 했던 것조차, 무의식 수준에서는 “이건 너무 소중해!”라며 저항하는 것이다(Gondry, 2004). 정서적으로 각인된 기억은 깡그리 날려버리기 어려운 이유를 잘 보여준다(Berntsen, 2009). 조엘이 아이같이 도망치고 숨기는 장면들은, 감정이 깃든 추억은 쉽게 소거되지 않는다는 심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불완전함까지 인정해야 온전해진다

조엘은 기억 속을 누비며, 갈등의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구속적이고 표현력이 부족했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치유적 재구성’ 과정을 연상케 한다(Pennebaker & Chung, 2011). 영화가 암시하는 바는 명료하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통째로 직면해야, 비로소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할 가능성

모든 시술이 끝난 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여전히 서로에게 끌린다. 마지막 장면,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 비디오 녹음을 듣고, 상처와 허물이 드러나자 한 번 더 고민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해볼래!”라는 결단과 함께,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다시 교감하기로 선택한다. 이는 마치 마음챙김(Mindfulness) 기법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데,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도 그걸 수용하며 다시 나아가는” 태도가 회복을 가능케 한다(Kabat-Zinn, 2003).



관계의 회복: 기억은 도움이 될까, 방해만 될까?


공유 추억이 만들어내는 재결합의 장

연인 관계에선 종종 함께 보낸 시간을 ‘우리 이야기(We-Story)’로 만들어간다(Fink & Slotter, 2018). 그런데 이 이야기 자체가 통째로 사라진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만약 그러한 공유 서사가 지워졌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다시금 둘이 만나려면, 또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shared experiences’를 빌려와 연결감이 형성되는 건 연애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빈 서판’으로 시작한다면 같은 오류를 반복?

가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말하지만, 문제는 과거 문제를 똑같이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심리학 연구를 봐도, 이별 후 재결합한 커플이 같은 갈등으로 재차 흔들리는 경우가 흔하다(Gottman & Silver, 2012). 과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지 ‘잊기만’ 했다면,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 셈. 영화 역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또 다른 갈등을 겪을 수 있음을 암시하지만, 이번엔 조금 더 성숙해진 상태로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남긴다.


외상 후 성장(PTG)과 정서적 회복력

고통이 남긴 상흔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더 깊어진 감정적 역량을 갖게 되는 현상을 “외상 후 성장(PTG)”이라 부른다(Tedeschi & Calhoun, 2004). 만약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완전히 서로를 지워버렸다면, 이 성숙한 기회를 박탈당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분적으로만 기억이 남은 탓에 둘은 ‘이상한 친숙함’을 느끼면서, 더 조심하고 상대를 배려할 가능성이 생긴다. 마치 고통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일부 품으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아픈 기억’까지도 포용해야 온전해진다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기억, 정체성, 사랑을 하나로 엮어내는 독특한 러브스토리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고통을 지우면 진정 자유로워지는가, 아니면 진정한 성장과 회복의 기회까지 빼앗기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기 때문이다. 영화 속 몽환적 연출과 뒤죽박죽되는 시간의 흐름은, 기억이 본래 지니고 있는 재구성적 특질을 형상화한다.


애착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스스로를 잊었음에도 다시 서로에게 끌리는 모습은, 표면적인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적 유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끝이 다소 애매하지만, 그들은 다시 시도해보기로 결정한다. 여전히 “예전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지만,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고, 서로의 결함을 인지한 채 만나는 것이 이전과는 다를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결국 이별을 단순히 지워버릴 ‘사건’이 아니라, 성찰과 변화를 위한 계기로 삼을 때, 우리는 더 강해지고 깊어진 유대감을 기대할 수 있다.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이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런데 심리학적 연구나 영화가 공통적으로 얘기하듯, 괴로운 기억이라 해도 그 안에는 내가 배우고 극복해낼 수 있는 중요한 ‘무언가’가 담겨 있다. 만약 그걸 아예 지워버린다면, 내 역사의 소중한 조각이 함께 증발해버리는 셈이다. 사랑의 상처도 결국 내 삶의 일부이며, 그 상처 위에서 새로운 방식의 애착이나 감정적 탄력을 얻을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렇게 “기억과 사랑의 고통스러운 온전함”이야말로 인간다운 것임을, 그리고 그 온전함 안에서 언젠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김을 보여준다.




keyword
이전 05화마음이 스크린을 만날때..._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