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스쳐 지나간 것들>
나는 매주 화요일마다 그림을 배운다. 겹겹이 덧칠해진 아름다운 색감이 완성될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 푸른 하늘의 색감과 푸른빛과 보랏빛이 감도는 세모진 지붕, 그 옆에 가지런히 자리 잡은 나무들...... 마음의 고민들로 바라봐 주지 못한 아름다운 세상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다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일 거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나에게 친절한 선생님과 커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도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선생님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내가 수업하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들이 그 시간 속에 담겨있다.
때로는 몸도 마음도 부는 바람처럼 추울 때가 있다. 이른 추위처럼 세상 속에 혼자 동떨어진 것 같은 이른 추위가 내 온몸을 감싼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이토록 외롭고, 불안하게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겨울나무 가지처럼 바람에 그저 흔들릴 때가 있다.
한 가지 색만 쓰지 말고, 여러 가지 색을 과감히 섞어 쓰라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나는 푸른 지붕을 푸른색과 갈색과 보라색을 섞어 칠하고, 붉은 지붕으로 넘어가 붉은색과 주황색과 갈색을 섞어 칠한다. 그렇게 한 사물, 한 사물을 정성스레 칠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오늘은 얼마 전 헤어진 남자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볼품없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믿었기에 그가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때도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먼저 말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다. 겹겹이 칠해지는 색감 위로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예전처럼 좋은 누나 동생 사이로 지내자는 말과 다정했던 눈빛과 말들이 어제의 일인 냥 차갑게 변해갔던 그 모습이..... 차가운 눈빛은 푸른 지붕 사이에 앉아 흩어져 갔고, 차가운 말투는 붉은 지붕 속에 스며들어갔다. 누나 동생으로 예전처럼 지내자는 그 예의 없던 말은 짙고 푸른 나무들 사이로 흩어져갔다.
상념과 겹겹이 덧칠해가는 색채 사이로 아픈 마음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아프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안의 나는 그 아픔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흐르는 물과도 같다. 나의 작지만 사소한 이야기들도 사소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아픔들도 그림 속 풍경 속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한 나의 이야기도 내 몸속에 녹아 다시 그림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이른 추위가 다시 봄으로 전환되는 시간이다.
유달리 눈이 많이 오던 올해 겨울도, 매일 반복되다시피 한 강추위도 다시 돌아올 봄 안에서 사르르 녹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돌아올 봄을
그림 속 풍경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