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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옥 Oct 27. 2022

구옥살이 9일 차

가전과 가구 사기

이 날까지도 나는 침대 없이 바닥 신세를 지고 있었다.

하루가 좀 덜 고되었다면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내가 왜 사서 고생일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베개라기보다는 쿠션에 가까운 무언가를 베고 눕자마자 혼절하듯이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침대 배송 업체는 한번 연장한 30일의 배송 기한을 넘기고 '코로나 때문에 공장이 안 돌아가서 수급이 늦어지니 양해 바란다'는 말만 반복 중이었다. 이미 카드값이 결제된지도 한참이라 환불을 하는 것도, 새 침대를 알아보는 것도 귀찮겠다 싶어 졌기에 얼마나 늦어지나 보자며 기다리기로 했다. 


잊고 있으면 언젠가 침대 프레임이 오겠거니, 하면서 어떤 가전제품을 들여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오븐/에어프라이어 겸용 전자레인지와 세탁기, 건조기, 그리고 냉장고. 


이 때는 무턱대고 빈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훌쩍 넘어가는 시점. 앓고 일어났더니 체력이 확 떨어져서 더 이상은 커피머신과 과자 쪼가리, 생수로 연명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식품과 위생의 중요성을 죽도록 아프고 나서야 깨닫게 되다니. 스스로가 참 미련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을 향해 혀를 쯧쯧거리면서 인생 최초의 채소 마켓 거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남의 손 탄 제품 쓰기는 싫다나 하는 헛소리를 뱉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앱을 설치한 것까지는 참 좋았다. 내가 하는 일이 대체적으로 아무 지식 없이 무턱대고 시작할 땐 참 좋더라고.


가뜩이나 좁은 집이니 그나마 흰색이 무난하고 넓어 보인다는 이유로 온 사방을 흰색으로 발라버리고 있었던 까닭에 가전도 흰색으로 들이기로 작정했는데 말이지. 나는 정말로 맹세코 흰색 가전제품을 사는 게, 적당한 가격대로 내가 원하는 사이즈를 구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덩치 있는 가전제품들을 보통 백색가전이라고 하잖아.......


하지만 놀랍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중고 가전은 내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상을 지니고 있었다. 회색과 검정 색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빨간 색도 의외로 많았다. 

백색이다 싶으면 이상한 패턴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없이 지내는 날이 또 하루 늘어나는가 싶던 찰나. 열몇 번째의 채팅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냥 집에 있는 물건을 죄다 파는 일반 판매자인 줄 알았는데, 채팅을 나누다 보니 용달로 배송하고 설치까지 해 주시는 진짜 업자 분이셨던 것. 냉장고를 사려고 채팅을 하면서 가격대와 색상만 맞으면 전자레인지 겸 오븐과 건조기 겸 세탁기도 사고 싶다고 하기 무섭게 내 주문에 정확히 맞는 아이템들을 보여주셨다. 



슬슬 집 같은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반쯤 포기하고 있던 나는 하루아침에 830L짜리 냉장고와 16kg 건조기 겸용 세탁기, 전자레인지를 지닌 버젓한 독거청년이 되었다. 심지어 다 합쳐서 40만 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나중에 엄마가 놀러 오셨을 때에 집에 있는 가전들 다 합쳐서 40 주고 샀다고 자랑했더니 엄마는 그 돈 주고 산 게 제대로 돌아가느냐며 매우 강한 불신을 내비쳤다. 



불신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



아무래도 빨래가 안 돌아가는 것 같다면서 한참을 들여다보시기까지 했다.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게 이 날 구입한 가전들은 아직까지 고장 없이 잘 쓰고 있다. 고마워요, 채소 마켓.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큼지막한 애들이 턱턱 들어서자 이제야 조금 사람 사는 느낌이 되었다. 가슴 벅찬 내 소감과 달리 동생의 평가는 여전히 '너무 하얘서 편집증 환자 집 같다'는 의견에서 달라지지 않았기에 가구는 우드 톤으로 들이기로 했다. 


너무 흰색 일색이라는 평가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보다도 장판 가는 걸 깜빡하고 가전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집에 원래 노란색 도는 우드 패턴의 장판이 깔려 있었는데 이것도 헤링본 타입으로 바꾸려고 작정하고 있었다가 그만... 가전제품을 너무 싸게 잘 구했다는 게 기뻐서 그만 당일 설치를........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싶었던 하수구, 배수구, 싱크대, 화장실의 꼴에 비하면 장판은 닦고 나니 못 살겠다 싶을 정도는 아니라면서 애써 나를 다독이면서 대망의 첫 가구를 들이려고 집 안을 휘 둘러보니 웬걸. 딱히 가구가 필요 없겠다 싶어졌다. 



세탁기 쪽에 수납공간이 있으면 고양이가 매우 좋아한다


붙박이장 비슷한 벽장이 하나. 건조기+세탁기를 워시 타워로 쌓는 대신 2 in 1 제품 하나로 해치운 덕에 세탁기 위쪽으로도 수납공간이 있고. 세탁기 맞은편에는 경량 랙으로 홈카페 겸 수납공간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결정적으로 주문한 뒤로 한 달째 감감무소식인 침대가 엄청난 수납력을 자랑하는 수납 침대여서 별도의 옷장도 필요가 없는 컨디션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수납력이었느냐면, 한 달이 넘게 기다리게 했다면서 욕을 퍼붓는 상품평에서도 수납공간 하나만큼은 욕 못한다고 쓰여 있을 정도였다. 


뭔가 사고는 싶은데 살 이유가 없는 현실. 

가구는 전부터 계속 가지고 싶었던 라탄 콘솔 하나와 캠핑용 폴딩 테이블 정도로 타협하고 본가에서 홈바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던 것을 가져와서 책상으로 쓰기로 했다. 

사다 보니 물욕이 생겨서 빨래건조대도 사고, 우드 트레이도 사고, 그릇장에 깔 매트도 샀다. 



급한 대로 토퍼라도 들여야겠다고 결심한 날이었다.


대체 침대는 언제쯤 도착할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이 날도 맨바닥에서 잠들었다. 허리에 통증이 몰려오긴 했지만 낮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다른 때보다는 조금 더 안락한 느낌이었다. 




:: 9일 차 장비 ::

청소용품 : 행주, 물티슈, 선반 매트, 세탁세제

생활용품 : 냉장고, 세탁기 겸 건조기, 오븐 겸 레인지, 콘솔, 캠핑용 폴딩 테이블, 우드 트레이, 빨래 건조대

생존용품 : 초강력 살충제 x3



:: 9일 차 교훈 ::

바닥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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