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온 뒤 벌써 열흘.
쑥과 마늘을 먹여 짐승을 사람 만드는 것처럼 집에 이것저것 발라서 사람 사는 꼴로 만들어 두었더니 슬슬 물욕이 솟기 시작한다.
그동안은 육체노동에 바빠 본래의 성향에 소홀하였으나, 원래 나는 타고나기를 맥시멀 리스트의 별 아래 태어난 인간이었다. 보다 많은 물건을 보다 많이 쌓아놓기 위해 효율적인 정리 방법을 고민하는 타입의 인간이 독립을 했다 해서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굉장히 방어적으로 변명이 길어지고 있는데...
심플하게 말하자면 한시름 놓으니 별 쓸모없는 물건들을 사 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사지르는' 소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시발, 사버려! 하면서 충동적으로 사는 물건과 아, 사야 하네... 하면서 내키지 않게 사는 물건으로.
전자는 보통 귀엽거나 예쁜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꽃 쓰레기 계열의 물건이고 후자는 사뒀다가 못 찾거나 잃어버렸거나 잘못 사서 다시 사야 하는 계열의 필수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발 비용 아이템
오로라 무드등
굳이 없어도 되지만 사서 잘 쓰고 있는 물건이다. 그간에는 힘들고 피곤하고 아파서 기절하듯 잠들었지만, 육체노동을 할 일이 줄어들기 무섭게 다시 불면에 시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꽤 예민한 축에 드는 편이라서 뭔가 불편하거나 고민스럽다 싶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데 이 오로라 무드등의 구름 흘러가는 패턴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기분이 되면서 스르륵 잠이 들더라고.
무용한 것들 중에서 제일 유용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레트로 타자기
채소 마켓 가전 쇼핑의 성공에 기뻐하면서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순간에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시발, 나 할 수 있어! 하면서.
왜 샀느냐 묻는다면 예뻐서....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대표적인 시발 비용 아이템이지만 탕탕탕! 하고 경쾌하게 글자가 만들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벽난로 히터
베란다에 카펫 타일을 깔아서 냉기를 막았으니, 쌀쌀해지기 시작하자마자 온풍기를 빵빵하게 틀어두고 쿠션을 깔고 길게 엎드려 놀며 척추건강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려는 작정으로 구입했다. 오직 디자인 하나만을 보고 구입한 탓에 제품력도 가성비도 엉망진창이지만 너울거리는 벽난로 불빛 LED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큰 장점이 있다.
멍청 비용 아이템
트럼펫 수전
대체 뭐에 홀렸었는지 별 어려움 없이 이 모양으로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안되더라.......
끼워보는 과정에서 물이 묻은 관계로 실사용 제품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반품이 안 되어서 이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어리석은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그럼 대가리만 갈아 끼워보자면서 헤드 교체형으로 구입했다가 이 또한 미묘하게 규격이 맞지 않아서 돈 버린 셈 치게 되어버렸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결국 싱크대 수전은 핸디 타입의 회색 도는 흰색 필터 수전으로 정착했다. 필터 수전을 사면서 교환용 필터도 분명 같이 사놓고, 어디에 뒀는지 필요할 때 찾지 못해서 다시 구매하면서 얼마나 스스로의 멍청함에 욕을 퍼부었던지.
싱크대 수전과 얽히기만 하면 이상하게 계속 멍청 비용을 소비하는 기분이다.
커튼봉
엄마가 이불을 적선해 주실 때 기존의 내 방에 있던 시폰 커튼도 가져다주셨다. 그래서 베란다의 이쪽저쪽에 짐 수납공간을 만들고, 커튼을 커튼봉에 끼워서 수납한 물건을 가리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실제로 장착해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예쁘지가 않다는 데에 있었다. 베란다 이쪽저쪽 둘 다 커튼을 쳤더니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길이까지 어중간해서 다른 곳에 활용할 수도 없는 상황.
이것 또한 기사용 제품으로 분류되어 반품이 불가했기에 나중에 도둑이 들어오면 쓰자면서 한쪽 구석에 세워 두었다.
책상 의자
본가에서 홈바로 쓰던 테이블을 가져와 컴퓨터 책상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까지는 완벽했다. 거기에 맞는 의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내 멍청함이 이번에도 문제였고.
급한 대로 페인트 칠을 할 때에 썼던 플라스틱 의자를 갖다 썼는데 디스크 환자에게 등받이도 쿠션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는 무리라는 사실만 몸으로 아프게 배우는 경험이었다. 허리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책상 의자를 먼저 주문했어야 했다는 진한 후회와 함께 책상 의자도 장만했다.
뭐에 씌었던 건지, 화이트와 우드 컬러 일색인 집에 검은색 의자를 주문해버려서 택배 포장 뜯고 한참을 그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었다는 뒷이야기.
숱한 헛소비의 끝에서 어느덧 구옥살이 2주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 10일 차 장비 ::
청소용품 : 핸디 청소기, 세탁기 건조 시트, 양모 볼 x6
생활용품 : 커튼봉, 싱크대 수전 필터 x12
생존용품 : 벽난로 히터
:: 10일 차 교훈 ::
계획적인 소비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