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구옥 Oct 13. 2022

구옥살이 3일 차

슬근슬근 톱질하세

만 하루만에 택배박스와 에어캡에 완전히 적응해서 깊은 숙면을 취했던 나는 전날 주문한 웨인스코팅 몰딩이 도착했다는 문자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대체 배송이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셀프 웨인스코팅 시작


마침 새벽배송으로 주문했던 톱도 문 앞에 놓여 있어서 톱으로 택배 상자를 해체했다. 






본가의 옥상 테라스 난간을 설치할 때에 그 톱질을 내가 다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별 어려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이사를 결심한 순간부터 모든 결정이 실수와 착각의 연속이었다. 



몰딩을 주문할 때엔 꼭 액자 타입으로 주문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대로 기성 사이즈에 맞춰 배송되는 몰딩으로 주문했더니 끝에 몇cm의 아주 사소한 길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내가 원하는 그림에 맞춰 잘라내려니 그렇게 번거롭고 힘들 수가 없었다.

그냥 조금 빡빡하게 느껴져도 자르지 말고 원래 사이즈대로 할 걸...하는 후회가 뭉글뭉글 일었지만 이미 톱을 댄 이상 죄다 잘라내서 길이를 맞추는 수밖에. 


다행스러운 한 가지는 어떤 노가다든 하다 보면 끝이 온다는 것 정도였다. 

이러다 손목을 잃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모든 몰딩을 내 입맛에 맞게 길이를 조정했다. 할 때에는 힘들지만 해놓고 보면 과하게 뿌듯해서 다시 자신감이 솟는다는 게 나의 제일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또 근본없는 자신감에 차서 힘을 얻은 나는 바닥에 모양을 잡아두고 벽에 붙일 준비를 시작했다. 


벽에 붙일 준비가 뭐냐 하면...

무턱대고 붙이면 가로, 세로 몰딩이 반듯하지 않고 비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부착할 위치를 표시해두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줄자는 준비했어도, 연필은 생각도 못했다는 것. 내가 가진 펜이라고는 구형 핸드폰에 딸린 S펜 뿐이었다.


보통 컨디션만 됐더라도 근처 문구점이나 마트로 사러갔을테지만 이 순간의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진가보다... 하며 다 내려놓으려던 찰나에 사흘 내내 시킨 물건들 중 하나에서 사은품으로 볼펜이 딸려왔던 게 생각났다. 이 볼펜 덕분이라 해야 할까, 때문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다시 노동에 임할 수 있었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긴 했다. 일도 과식도 흐름 끊기면 안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술에선 연신 한숨이 터졌다.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쓸모도 없는 후회를 반복하면서도 손은 실리콘건에 본드를 장착하고 있었다. 실리콘 실란트 류를 사용해 고정한 다음, 퍼티로 빈틈을 메꿔서 마스킹 테이프로 형태를 잡아두면 순식간일거라 생각하면서.


당연히 이 일도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혼자 하려니 한쪽을 붙이면 다른 쪽이 떨어지거나, 다 붙였다 생각하면 묘하게 수평이 안 맞는 일 따위가 이어졌다. 

어찌저찌 한쪽 벽을 완성한 뒤에야 이건 혼자 할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알고 있는 욕을 다 퍼부었는데 더이상 욕이 생각나지 않아 바닥에 그냥 드러누웠다. 




 


더 진행할 기력도 의욕도 없는데 떼어내기엔 너무 늦었다. 톱질의 잔해가 엉망으로 흩어진 바닥에 빨아 던져 둔 걸레처럼 누워서 이걸 어쩌나... 멍하니 생각하다가 옆 동네에 사시는 큰고모에게 도움을 청해보았다. 


팔자에 없는 육체노동을 이어가는 조카를 갸륵히 여긴 고모가 침낭과 간식 등을 챙겨와 주셨다. 덕분에 양 끝을 잡아줄 소중한 두 손과, 침구 비슷한 것과, 당분을 얻을 수 있었다. 





두 개이던 손이 네 개로 늘어나니 작업 속도가 몇 배로 빨라졌다. 



몰딩 붙이는 시간 - 몰딩 붙인 본드가 마르는 시간 - 핸디코트로 메꾸는 시간 - 핸디코트 마르는 시간 - 사포로 건조된 핸디코트 갈아내는 시간 - 페인트 바르는 시간 - 페인트 말리는 시간 - 페인트 덧바르는 시간 - 덧바른 페인트 말리는 시간  


아주 이른 아침에 시작해도 저 과정을 다 거치고 나니 완전히 한밤중이 되었다. 소음이 생기는 작업이 아니라 다행이었지.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걸 왜 혼자 하려고 버텼는지 후회하면서 완성된 웨인스코팅을 향해 박수를 치고 해산했다. 

그리고 고모와 나 둘 다 몸살을 얻었다. 


그 당시에는 용병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판단에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분께 도움을 요청한 거였는데... 꾸물꾸물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려 하니 칠순 어르신에게 참 못할 짓을 부탁했다 싶은 죄책감을 안고 사흘째의 밤을 보냈다. 





:: 3일 차 장비 :: 

청소용품 : 걸레

생활용품 : 볼펜

생존용품 : 침낭, 젤리, 맥반석 달걀 6개, 종합감기약



:: 3일 차 교훈 :: 

생각을 하고 움직이자

벽은 완벽한 수평도 수직도 아니고 완벽한 평면도 아니다

상비약은 건강할 때에 미리 사 두자

도파민에 휘둘리기 금지




이전 02화 구옥살이 2일 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