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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옥 Oct 13. 2022

구옥살이 2일 차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연속

눈만 감았지, 잠 한 숨 자지 못한 채로 본의 아닌 구옥 입주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락스와 발샴푸 덕에 그나마 사람 사는 집 꼴이 된 개수구와 배수구 등을 둘러보면서 내게 당장 무엇이 필요할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사실 독립을 결심하면서 세입자가 이사 나가는 날에 맞추어 공사를 시작하려고 인테리어 업자에게 연락을 해보았었다. 

한 곳은 담당자가 없다며 다시 연락 주겠다더니 답이 없고, 다른 곳은 자기네는 작은 평수는 안 한다고 하고, 또 다른 곳은 예산 논의까지 마친 상황에서 갑자기 150만 원을 올려달라고 하더라고. 

아마 내가 처음 연락했을 무렵이 역병 환국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을 때, 한참 인테리어 업체들 콧대가 하늘을 찌를 때여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나는 굉장히 빈정이 상한 상태로 혼자서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역시나 화장실 문이었다. 

문 아래쪽을 왜 달력으로 붙여놨나 하고 뜯어봤더니 아랫부분이 다 썩었더라고. 흉갓집처럼. 

이래 놓고 그냥 이사를 가셨단 말인가...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그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나는 하필 세입자가 이사 나가는 날에 몇 달 전부터 잡혀있던 출장 스케줄이 있었고, 그러니 지금 와서 짜증을 내 봤자 무용한 수고였다. 



셀프냐, 전문 시공이냐

혼자 해 보겠다며 전투에 임한 이후로 지금까지도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이다. 용병을 쓸 것인가, 죽으나 사나 혼자 버텨 볼 것인가.

화장실 문을 교체도 그랬다. 

비용은 인터넷 최저가나 동네 철물점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내가 직접 해야 하지만 철물점에서 사면 사장님이 설치까지 해 주신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었기에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다. 

가격은 만원 정도 차이였지만, 셀프시공+배송 소요시간 vs 전문가 시공+당일 설치의 두 조건에서는 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before / after




화장실 문짝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흉가에서 사람 사는 집 비슷한 형상이 되었다. 돈 쓰는 보람이 이런 거구나, 생각하면서 싱크대로 눈을 돌렸다. 







고백하자면, 싱크대와 신발장을 싹 교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얘네가 생각 이상으로 너무 튼튼하더라고. 문짝이 엇맞거나, 합판이 터졌거나, 갈라졌다면 미련 없이 바꿀 생각이었지만 구시대의 하이그로시 제품은 너무나도 튼튼했다. 마치 80년대 금성 전자레인지가 현역 LG 전자레인지 이상으로 쌩쌩한 것처럼. 요즘 애들에 비해 흙 파먹고 놀던 예전 애들이 훨씬 건강한 것처럼.


색이 누렇게 떴다는 것 외에는 딱히 교체할 핑계를 찾지 못한 나는 또다시 하지 말았어야 할 결정을 하고 만다. 

상, 하부장 웜화이트 올 도색. 


이 또한 몰랐기에, 무식했기에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페인트라는 게 그냥 슥슥 발라 말리는 데에서 끝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하이그로시 장에 페인트를 제대로 칠하려면 표면을 아주 매끈하게 닦고, 그 표면을 사포로 꼼꼼히 갈고, 주변에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마스킹 테이프와 비닐 등으로 보양 작업을 해야 한다나. 

이 번거로운 짓을 다 끝낸 뒤에야 겨우 내가 '페인트칠'이라고 생각했던 본 게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선주문 후 검색을 통해 끝내주는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이마를 치면서 주문을 취소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한 발 늦었다. 

무슨 일을 하든 장비부터 갖추고 하는 나는 생각과 동시에 셀프 페인팅 세트 따위를 주문해버렸고, 배달의 민족은 오전에 들어간 주문을 순식간에 택배사로 인계해버렸다. 이게 다 빨리빨리의 민족인 탓이었다. 

후퇴하기는 이미 늦은 상황 앞에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동네 문구점으로 가서 사포를 한 움큼 사 왔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밑준비를 하는 기분으로. 


세월을 타서 갤럭시 플립 3의 베이지 컬러가 된 하이그로시 장을 사포로 문지르고 있을 때. 잠 못 이루던 밤에 충동구매한 전동 공구 세트가 도착했다. 독립을 하면 꼭 사겠다고 벼르고 있던 로만의 필수템 같은 물건이었다. 야무진 독립생활의 여부는 전동 공구 세트가 결정한다고 믿으면서. 



전동 드라이버의 활약에 힘입어 비교적 내 관절의 고생 없이 전 세입자의 흔적을 지워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전동 공구는 이사 온 뒤로 사지른 물건 중에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아이템이 되었다. 전 세입자분이 오만 곳에 박아둔 나사못을 제거하는 데에, 새카맣게 먼지가 쌓이고 그을린 구식 전등을 LED 등으로 교체하는 데에, 문고리를 바꾸는 데에 등등- 아주 유용하게 사용 중이다. 

네 시작은 비록 충동구매였으나 네 끝은 심히 유용하리라. 


여기에서 만족하고 가만히 커피나 마셨으면 좋았을 것을. 

왜 겁도 없이 페인트칠을 하겠다고 덤볐느냐며 자책하던 나는 경쾌하게 돌아가는 전동 드라이버 소리에 기운을 얻어 일을 더 키우고 말았다. 






어차피 할 페인트칠이라면 웨인스코팅에도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자마자 내 손가락이 몇 개의 직사각형을 그리더니 주문까지 쭉 진행해 버리더라고.


먼지 냄새와 음식물 썩는 냄새 대신 락스 냄새가 풍기는 집 안에서 나는 다음 전투를 대기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택배박스 위에 누워 에어캡을 덮었다. 




:: 2일 차 장비 :: 

청소용품 : 락스+1, 트래펑 +1, 사포 10장 

생활용품 : 치약&칫솔, 바디용품, 물티슈, 줄자

생존용품 : 전동 공구 세트 



:: 2일 차 교훈 :: 

사포질을 할 때에도 마스크는 필수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고통의 역치는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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