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독립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세 주던 집에 내가 들어가 사는 게 낫다는 판단에 닿길래 이사를 결정했는데... 여기서부터가 실수였다.
직장이나 학교라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 이사를 했다면 '좋으나 싫으나 살아야 할 곳'이라 생각했을 텐데 나는 그런 이유나 목적이 없었다. 그냥 이 나이쯤 됐으면 혼자 살 때도 됐다 싶었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을 뿐.
이사를, 독립을 결심했던 순간의 내가 '구옥에 산다'는 문장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담고 있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면 아마 나는 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확실히 안 왔겠지.
사람도 30년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곡소리가 나는데 1기 신도시의 지어진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가 왜 멀쩡할 거라 생각했을까.
핑계를 대 보았다.
아는 게 없으면 용감하고, 용감하면 실행이 빠른 법이라면서.
사실 나의 처음 독립 계획은 이런 막무가내가 아니었다. 어차피 내 집이니 천천히 느긋하게 '살 만한 곳'으로 고친 뒤에 차근차근 짐을 옮기자는... 제법 계획적인 모양새였다.
물론 이 계획은 보기 좋게 깨졌다. 나는 뭘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피땀 흘려 마련한 부모님의 집에서 나태하게 지내며 스스로의 본성을 잊은 것. 그것이 나의 패착이었다.
잊고 살던 성향을 자각하게 된 것을 순전히 직전의 세입자 덕으로 돌려본다.
그 세입자가 청소와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었던 탓이라고. 이사를 나갔으나 신체의 온갖 일부분과 꽤나 많은 삶의 흔적을 남기고 간 세입자 탓이라고.
한없이 게으른 삶을 지향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부분만큼은 깨끗해야 한다 주장하는- 꽤나 이율배반적인 나는 헛구역질을 하면서 이사 들어갈 집의 청소를 시작했다. 구옥살이의 파란만장한 나날은 청소부터 시작되었다.
끝도 없는 얼룩. 끝도 없이 나오는 머리카락. 끝도 없이 발견되는 B 씨의 사체.
쓰레받기와 빗자루와 청소기와 청소용 티슈, 그리고 락스 정도면 되겠거니 했던 내 예상은 화려하게도 박살 났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하루 종일 락스와 세제와 그 유명한 발 세정제를 한 통씩 다 비웠는데도 청소는 끝나지 않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인간이었던 나는 이 날, 본가로 돌아가지 못했다.
잘 생각이 없었으므로 침구가 있을 리 만무했기에 새벽 배송으로 배달된 청소용품의 포장지, 신문지, 에어캡, 택배 상자 따위를 깔고 덮고 베고 잠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폭풍의 언덕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샷시와 현관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고막을 뒤흔들었다.
수많은 사막에서 야영을 할 때에도 이렇게 리얼한 노숙자의 형상은 아니었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누가 등 떠밀어 한 결정도 아니라 원망할 상대는 나뿐이었다. 청소를 하다가 신문지와 에어캡과 종이상자를 잠자리 삼아 바람소리가 귓방망이를 후려치는 집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원망하면서 락스 냄새와 먼지 냄새가 나는 집에서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구옥과 제대로 싸워보자고.
:: 1일 차 장비 ::
청소용품 : 빗자루, 쓰레받기, 청소기, 청소용 티슈, 철 수세미, 천연 수세미, 락스, 트래펑, 발샴푸
생활용품 : 종이컵, 종량제 봉투 10P, 두루마리 화장지, 플라스틱 간이의자
생존용품 : 택배 상자, 에어캡, 신문지, 커피머신, 캡슐커피, 생수 2리터, 마스크 10P
:: 1일 차 교훈 ::
주방 묵은 때는 전용 세제보다 발샴푸가 더 잘 닦인다
줄눈, 실리콘 곰팡이 위로 화장지를 놓고 락스를 쪼르륵 따라서 적신 다음, 젖은 화장지를 가볍게 눌러 고정시키고 한나절 정도 놔두면 새것처럼 하얘진다
락스를 쓸 때엔 마스크 필수!
레인지 후드는 두꺼운 비닐에 넣고 트래펑을 부어준 뒤에 한나절 방치하면 기름때가 싹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