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지옥
넷째 날 아침도 택배 문자와 함께 시작했다. 열 오른 머리와 묵직하게 늘어진 사지를 이끌고 비틀비틀 일어나서 현관문을 여니 내 키만큼 쌓인 각종 페인트들이 도착해 있었다.
전날 고모가 주고 가신 젤리와 달걀과 제약회사의 기술력을 믿고 페인트칠을 위한 밑작업을 시작했다. 다들 페인트를 칠하는 것보다 보양이 힘들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셀프 웨인스코팅 작업이 너무 힘들었던 덕인지 보양작업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조심히 칠한다 해도 페인트는 여기저기 튈 수밖에 없고, 아무리 수성 페인트라 해도 묻은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때문에 '불필요한 곳에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포장하는 보양 작업은 필수 중 필수.
나는 페인트를 살 때에 마스킹 테이프와 비닐이 한데 합쳐진 보양 비닐도 함께 주문해서 한결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완벽하게 포장된 싱크대와 수전 부분을 보며 셀프 박수를 쳐 주고 타일 페인트부터 집어들었다.
타일 페인트는 쉽게 까진다는 둥, 잘 안 발린다는 둥 하는 혹평이 워낙 많아서 꽤나 걱정했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주방과 화장실 벽에 사용했는데 둘 다 헤라나 철쑤세미 등으로 힘주어 긁지 않는 이상은 벗겨지거나 들뜨지 않는다. 발색력도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딱 한번 발랐을 뿐인데도 원래 타일에 인쇄되어 있던 메탈 장미 모양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감동해버렸다.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최소 이틀 정도는 물기가 닿지 않도록 바싹 말려주고, 표면에 이물질이 없도록 꼼꼼히 닦아두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싶다.
순식간에 타일 페인트를 완성하고 이 자신감이 꺼지기 전에 싱크대 상, 하부장용 페인트를 꺼내들었다.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진행되던 중에 얘가 조금 말썽이었다.
분명 하이그로시 텍스처에도 사용 가능하다 해서 구매했는데 유리 위에 물 떨어진 것처럼 페인트가 먹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더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흉측하게 붓자국, 롤러자국, 뭉침 현상이 생기더니 한번 더 덧바르니 그런 자국 없이 매끈한 표면이 되길래 겨우 한시름 놓았다.
사흘 연속 후회를 반복했더니 이젠 뭘 해도 내가 잘못했나,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되는 느낌이라 약간 찜찜해하면서.
순식간에 주방 쪽을 끝내고 벽지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혼자 안될 것 같을 때엔 괜히 고집 부리지 말고 얼른 도움을 요청하자는 전날의 교훈에 힘입어 2호와 2호의 남자친구를 소환했다.
주관적으로는 평균 신장이라 우기고, 객관적으로는 평균 신장에 약간 못 미치는 나에 비해 훨씬 커다란 두 사람이 온 덕에 벽지용 페인트칠은 굉장히 빨리 끝낼 수 있었다.
페인트라고 다 같은 페인트가 아니라 타일용, 시멘트용, 목재용, 벽지용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길래 내가 필요한 곳에 맞추어 아주 다양한 페인트를 주문했는데... 다 하고 보니 아주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방 벽, 싱크대 상하부장, 벽지의 흰 색이 죄다 미묘하게 다른 화이트라서 같은 듯 다른 느낌으로 통일감있는 화이트 인테리어 베이스가 완성되더라고.
진짜 이게,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벽장 문도 시트지를 모두 제거하고, 사포질을 한 다음에 페인트를 칠해주었다.
너무 모자라지도 않고, 너무 과하지도 않게 남은 페인트를 보니 더 뿌듯해졌다.
평면도상의 면적과 내가 실측한 면적을 따져서 비교하고 구입한 덕이지 싶어진 순간.
스위치 커버까지 새로 구입한 것으로 바꾸고 나니 이제까지의 힘들었던 기억이 다 씻겨나갈 정도로 다른 집이 되어 있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고 자야 했지만 나에겐 침낭이 있었으므로 밤바람도 두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후회 없이 완벽하게 개운한 하루를 보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주방도, 방도, 욕실도 환해졌는데 왜 이렇게 뭐가 못마땅할까.
결론은 조명이었다.
:: 4일 차 장비 ::
청소용품 : 신너
생활용품 : 붓, 롤러, 페인트, 헤라, 목장갑, 라텍스장갑, 보양용 비닐
생존용품 : 철제 사다리
:: 4일 차 교훈 ::
마스킹 테이프는 페인트가 다 마르기 전에 떼어내야 한다
하늘 아래 같은 색 페인트는 없다
페인트칠은 스위치 및 콘센트 커버를 벗기고 시작하자
내 체력은 믿을 게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