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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Dec 13. 2023

그럼 너 가수야?

노래로 돈을 벌어본 적은 없어도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기숙사 입주는 개강일 전 토요일부터 가능했다. 난 그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맨해튼 다운타운에 있는 에어비앤비에 짐을 풀었다. 숙소에서 타임스퀘어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예약해둔 유심도 픽업할 겸 시내를 걸으며 노래를 들었다. 선곡은, 친구가 추천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Welcome to New York.


뉴욕은 서울과 꽤나 비슷했다. 높은 건물들, 넘치는 인파,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는 것. 여유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바쁨을 즐기는 듯한 사람들. 어딜 보나 쏟아지는 외국인 관광객.


그러나 차이도 있었다. 일단 케이팝의 위력이 생각보다 훨씬 실제적이라는 게 느껴졌다. 뉴욕 거리의 가장 큰 전광판에서 BTS와 뉴진스, 심지어 펭수가 손을 흔들었다. 공중 위생이나 대중교통의 안전 면으로는 서울이 훨씬 선진화돼 있었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스크린도어가 없어 철도 사고가 나기 쉬워 보였고, 길가에서는 대마와 오줌 냄새가 섞여 이상한 지린내가 났다.


그럼에도, 활기 넘치는 거리를 걸으며 모자람 없이 음미했다. 내가 새로운 삶을 모색하러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여기 있는 동안 나는, 이력보다는 방향성으로 나의 가치를 가늠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숙사는 맨해튼보다 조금 아래, 강을 건너 다리로 연결된 브루클린에 있었다. 입주 날 오후에 이어진 기숙사생 오리엔테이션에서는 말 많은 영화 전공 학생이 안내를 맡았다. 이 곳에서 2년째 지내고 있다던 그는 종종 아침에 조깅을 나가는데, 한 번은 맷 데이먼을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건물 내 헬스장이 두 달 전에 폐쇄됐다는 말에 좌절하고 있던 차라 그렇다면 나도 아침 조깅을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난 맷 데이먼 출연작 전수 주행에 도전했던 전적이 있다.) 기숙사에서 출발해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갔다 오면 딱 3km 정도의 거리였다. (조깅은 매주 서너 번 나갔지만 맷 데이먼은 결국 못 보고 건강만 얻었다.)


입주 다음 날인 일요일, 기숙사에서 주최하는 브루클린 브릿지 워킹투어가 열렸다. 여기서 마리아를 만났다. 나보다 두 살쯤 어린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뉴욕의 반대편 끝인 LA에서 온 친구였다.


마리아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연기가 하고 싶고 자기가 가능성이 있을지 알아보고 싶어 여기 왔다고 했다. 정치를 공부했지만 연기가 하고 싶었던 여성과 경제를 공부했지만 노래가 하고 싶었던 여성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마리아는 나에게, 넌 뭘 위해 여기에 왔냐고 물었다. 난 뮤지컬 수업을 듣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마리아는 자긴 노래를 전혀 못한다며, 나에게 원래 노래를 하느냐고 물었다.


Do you sing? So you're a singer?
너 노래 해? 그럼 너 가수(노래하는 사람)야?


영어로 'singer'는 '노래하다'라는 뜻의 'sing'에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접미사 'er'가 붙은 단어에 불과하다. 가수냐는 뜻이기도 하지만 노래하는 사람이냐는 뜻이기도 하다. 'Do you sing?'이라는 물음에도 단지 본업으로 노래를 하냐는 의미만이 아니라, 적어도 삶에서 굴리고 있는 여러 바퀴 중 하나로서 노래라는 바퀴를 굴리고 있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노래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했다가는 덜컥 '나 가수야'라는 대답이 될까 망설여졌다. 이 사람들 케이팝 알 텐데. 잠시 착각으로라도 감히 그 선상에 놓이는 거 아닌지 걱정도 됐다. 그래서 "그건 아닌데"라고 대답했더니, '그럼 처음으로 노래를 해 보는 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아니, 그것도 아닌데..."


이런 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계속됐다. 기숙사에는 뮤지컬 학생들만이 아니라 학교의 다른 전공 워크샵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함께 지냈고, 이 기간이 끝나 흩어지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첫 만남을 가지면 바삐 서로 자신의 삶을 소개했다.


뮤지컬 수업을 듣는다고 말할 때마다 'Are you a singer?'라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지 않으려니 대답이 점점 길어졌다. "그게, 노래를 하긴 할 건데, 난 주로 노래를 혼자 했고, 교회에서 했고, 연습실에서 했고, 내 방 안 옷장에서 했고, 이젠 무대에서 하고 싶고..."


주절주절 설명하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뭐 어떠냐. 어차피 저건 노래가 본업인지 취미인지, 내가 프로인지 세미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 얼마나 훌륭히 경력을 쌓아왔는지를 구분하려는 질문이 아니었다. 상대는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난 노래하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노래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사람인 걸. Singer, 맞잖아.


그래서 누군가 "Are you a singer?"라고 물어올 때, "Yeah, I am."이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예 내가 먼저 "I'm a singer."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고 치다가 결국 불러 주기도 했다.




알고 보니 다들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연기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연기라는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자신을 actor(배우)라고 소개했고,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 사람들 역시 글쓰기라는 바퀴를 굴리고 있는 자신을 writer(작가)라고 소개했다. 연기 경력이 있는지, 출간되거나 영화화된 작품이 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력보다 방향성에 기대어 자신을 소개했다.


이러다가도 어느 날, 좀 소심하게 "I consider myself a singer(난 나를 singer로 여겨)." 정도로 말한 적도 있다. 그랬더니 친절한 상대방은 "Then I consider you a singer too(그럼 나도 너를 singer로 여길게)."라 대답해 줬다.


맞아, 내가 먼저 나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여겨줘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나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여겨줄 수 있지. 노래로 돈을 벌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노래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너, 노래하는 사람이야? Are you a singer?

Yeah, I am.

2인 1실인 기숙사 방은 당황스러우리만치 비어 있어서, 시트와 이불을 직접 사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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