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영 Dec 16. 2023

당신의 꿈의 배역(dream role)은 뭔가요?

선생님의 첫 질문에 울어 버렸다

당신에게 뮤지컬은 언제 시작되었나요?
 그리고 당신의 꿈의 배역(dream role)은 뭔가요?


퍼포먼스 랩 수업의 첫 시간, 선생님이 모두에게 자기소개를 시키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수강생은 다섯 명. 나란히 앉은 순서대로 대답을 시작하는데 내가 앉은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첫 친구가 대답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대뜸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눈물을 멈출 수도 없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구도 나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워크샵 중간에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 과정이 각자에게 감정적인 여정(emtional journey)이기도 해서인가보다고, 나중에 우리는 말을 나눴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 선생님은 말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괜찮다면 눈물의 이유도 함께 나눠 달라고 했다. 모두가 기다려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눈물이 터진 이유는 꿈의 배역이라고 떠오르는 게 없어서였다. 떠오르는 게 없는 이유는 내가 한 번도 내 꿈의 배역이 뭔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유는 내가 나에게 그런 질문에 답을 해볼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뮤지컬은 <레 미제라블>보다 더 어릴 때 시작됐다. 사실은 초등학생 때 본 <바비: 공주와 거지>가 더 이른 뮤지컬이었다. 동생과 함께 스카프를 망토처럼 두르고 공주 흉내를 내며 영화에 나오는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전인, 아마 미취학아동이었던 4~5살, 동네 문화센터에서 하는 영어 뮤지컬 수업도 들었던 적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공연에서 카드 병정 중 하나를 맡았고, 모두가 나란히 서서 노래하는 마지막 피날레 곡에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다 결국 아무데나 서서 춤을 췄었다.


어떤 뮤지컬의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나는 왜 나에게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나?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 겨울에 <레 미제라블>을 보면서 '저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생각을 하고도 내 삶의 항로를 틀지 못했을 때, 그때 나는 이미 슬펐다.




뮤지컬이라는,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그 음악과 서사의 가슴 뛰는 화학작용을 사랑함에도, 그 일부가 되고 싶어 아플 지경임에도, 살면서 본 뮤지컬 공연의 개수가 손에 꼽는 이유 역시, 내가 저 위에 있지 못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객석에서 잠시 바라보다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내가 진짜로 새로운 길에 달려들어 도전하고 책임질 자신이 없었더라도, 그저 나의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질문 정도는 스스로에게 던져줬을 법도 한데. 그것도 한 번 안 해봤다는 게, 스스로에게 그 정도도 너그럽지 못했다는 게, 선택에 책임지라는 말만 스스로에게 해 왔다는 게, 나 자신에게 미안하고, 너무너무 슬퍼서.


그래서 난 선생님의 첫 질문에 울어 버렸고, 그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오래오래 울었다. 누구도 빨리 진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 수업 동안 나는 노래하면서 울고, 선생님이 종이에 쓰라고 한 것들을 쓰면서 울고, 다른 친구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울고, 내가 발표하다가도 울었다.


그러는 동안, 노래하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그렇게 세상에 나의 존재를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보지 못했던 내 안의 내가, 처음으로 위로를 받았다.


학교 지하 극장 앞에 있었던 포토월. 쇼케이스가 끝나고 우린 모두 각자 주인공이 되어 여기서 사진을 찍었다.


이전 04화 그럼 너 가수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