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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Dec 20. 2023

'정답'이 아닌 '나의 답'을 내놓는다는 것

남의 세계에서 살기를 멈추는 순간


그건 네가 가수이자 배우로서 스스로 결정해야지.


“이 가사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가 맞는 거죠?” 라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내가 고민해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 노래의 주인공이라면 이 대목에 내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그러니 이 가사는 어떤 심정의 표현일지, 같은 마음을 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길 원할 것인지. 기준은 오로지 내가 이 인물에 대해 아는 것, 나의 생각, 나의 강점과 약점,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 나의 판단이었다.


그러면 난 대책없이 당황하곤 했다. '왜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거지? 틀리면 어떡하라고?'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결정하라는 요구는 약간의 공포를 유발했다. 이십 년 이상을 정답을 찾는 데 길들여졌으니,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의사결정하라는 말이 낯설었다.


그러나 이건 내가 이미 독립된 예술가로 대우받고 있음을 뜻했다. 갓 시작했지만 여기서 나는 뮤지컬을 할 '준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뮤지컬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술적 역량이나 성취와 상관없이 예술가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책임질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건 나에게 두려움과 함께 굉장한 유능감을 줬다. 그 뿌리는 대학을 졸업할 때쯤 빨리 이 사회 안에 나의 자리를 얻고 싶어 했던 마음과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술가들 각각이 만들어 겹치고 충돌하는 그 세계들 사이에 나의 이름이 붙은 것을 집어넣는다는 것.


나의 세계. 그건 해방감, 다른 말로는 자유였다. '나도 예술 하는 사람이오'라고 말할 자격을 얻은 기분이었다. '정답'이 아닌 것을 '나의 답'이라고 내놓을 자격을 얻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건 애초에,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때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클럽이란 곳을 가봤다. 술도 마시지 않고 기준이나 요령도 없어 안전지대에 머물길 선호했던 학부시절, 내 상상 속의 클럽은 온갖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약간 완벽주의적인 기질 탓도 있었다. 내 생각에 완벽주의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하는데, 특히 20대 초반의 나는 분별하거나 조절할 자신 없는 것들을 흑과 백 중 죄다 흑의 영역으로 분류해 놓고 통째로 외면하는 쪽을 꾸준히 선택했다. 내 나름대로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었고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 탓에 이런저런 걸 많이 놓쳤다.


시작을 그렇게 하니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도 계속 '청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회색을 모두 검은색으로 분류해 버리면 결국 흰색이라 부를 영역이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그리고 세상은 사실 흑백이 아니라 오색찬란한 빛이 뒤엉켜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춤을 추러 많이들 간다는 ‘그곳’도 궁금해졌었다.


사실 호기심보다 더 큰 문제는, 너무 진공상태에서 초기 성년기를 겪는 바람에 내가 전혀 모르는 너무 큰 세계가 있다는 주관적 결핍감이었다.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본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뭘 모르는 것 같아 괜스레 위축되는 비합리적인 현상을 겪고 있었으므로, 슬슬 나의 경계를 넘어 봐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안전하게 믿고 따라가볼 사람이 없었을 뿐.


이때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는 나이로는 나보다 한참 어린 21살의 사이프러스(Cyprus) 출신 여성으로, 영국에서 영문학을 전공 중이지만 방학을 맞아 연기에 도전하기 위해 뉴욕에 와 있었다. 이름은 멜(Mel). 지중해성 기후의 나라에서 자라 흥이 많고 친화력이 좋았던 멜은 클럽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내 말을 듣고 당장 그 주말에 나를 데리고 시내로 외출 약속을 잡았다.


클럽 경험이 많은 멜과 그 친구들은 어색해하는 나에게, 언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내가 집에 가고 싶은지 갈 땐 어떻게 갈지 알려주고, 누가 집적대려 하면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쳐내주며 나를 챙겨주었다. 칵테일이 난생처음이라 라즈베리가 들어간 아무거나 주문했다는 내 말에 이것도 좋아할 거라며 마르가리타를 가져다주었다.


이십 대 초반부터 나를 알아 온 사람들이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클럽에서 칵테일에 알딸딸해져 몸을 흔드는 이하영? 그 얌전한 유교걸이?


그러나 거기서 난 모범생도, 교회언니도, 책임감 강한 K장녀도 아니고 그냥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하고 싶은 걸 하는 이십 대 중반 사람이었다. 그게 뭐 그리도 어려워서 뉴욕씩이나 가야 할 수 있었던지.


멜과 그 친구들 덕분에 그날 밤 나는 남미 음악이 흘러나오는 북적북적한 클럽에서 걱정도 없이 신나게 춤을 췄다.




아직 파티가 무르익고 있던 새벽 한 시 반쯤 순전히 체력 이슈로 택시를 타고 먼저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요즘 내가 여러모로 나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 결과물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했다. 예술은 검은 것을 희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색깔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으니까. 누구도 거기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쳐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난 답지에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답을 써낼 수 있었다.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시도하는 데에도 비슷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습관처럼 읊어 대던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어쩌면 막연한, 그러나 강력한) 기준을 넘어선다는 건, 행동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의 결과를 받아들일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위에 가려진 내 진정한 욕망을 찾아내고 추구해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답’이 아니라 ‘나의 답’을 내놓기 시작하는 것. 내가 정해 놓은 나의 안전지대를 넘어서는 것. 이 모든 것이 도전이었고, 새로 태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살기를 멈추고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여느 독립이 그렇듯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밀려왔다. 여기 뉴욕에서 난, 나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학교 교실을 빌려 연습실로 사용하곤 했다. 뉴욕에 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은 노래를 부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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