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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Dec 06. 2023

다른 행성에 살 수 있다면 뮤지컬 배우가 되겠어요

엉뚱한 질문을 던졌더니 묻어둔 열망이 끌려나왔다

지구가 아닌 다섯 개의 행성에서 각각 다른 직업을 마음대로 골라 살 수 있다면, 어떤 직업을 고르겠는가?


아직 학부생이던 3년여 전, 코로나 한가운데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실존적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지인이 추천해 준 <인생학교: 일>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책은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먼저 자신을 탐색하길 권했다. 자기 탐색을 돕기 위한 질문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였다.


”지구가 아닌 다섯 개의 행성에서 각각 다른 직업을 마음대로 골라 살 수 있다면, 어떤 직업을 고르겠는가?“


난 이 질문을 좀 더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정도로.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닌, 제약 없는 선택이 가능하다면 고를 일. 이 질문에 내가 처음 쓴 대답은 '뮤지컬 배우'였다.


그때 그렇게 답을 써 놓고 어떤 액션을 취했냐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경제학을 전공했으니 현생과는 퍽 거리가 있는 답변이었다. 그때는 보다 현실적이라 느껴졌던 다른 목표들을 세우고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 질문에 저런 대답을 해 두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더 거슬러올라가 중학교 3학년, 외고 입시가 막 끝난 12월이었다.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이 한국에서도 개봉해 가족과 함께 봤다. 충격의 도가니였던 두 시간 반을 지나 마지막 넘버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장식하는 피날레를 멍하니 바라보며 난 혼자 결연히 생각했었다. '언젠가 저런 일을 해야겠다'고.


다만 '저런 일'이 '어떤 일'인지는 정확하게 분간해내지 못했다. 당시 난 노래나 작곡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고 대신 글은 좀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런 일'에 내가 참여한다면 아마도 뮤지컬 넘버의 가사를 쓰는 일로가 아닐까, 막연히 짐작했다(작사가 얼마나 음악적인 활동인지 전혀 모를 때였다).


게다가 1년을 열심히 달려 원했던 외고에 합격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힘겹게 얻은 인생의 항로를 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이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저 쪽으로도 어떻게든 닿는 날이 오겠거니, 스스로를 설득하며 난 뜨거운 뭔가를 마음 깊숙이 묻었다.




행성에 대한 질문이 다시 떠오른 건 퇴사를 하고 뉴욕에 갈 준비를 하면서였다. <인생학교: 일>로부터는 3년, <레 미제라블>로부터는 10년이 지난 뒤였다. 워크샵 지원을 위해 에세이를 쓰며 내가 왜 뮤지컬을 해야만 하는지 페이지 위에 열변을 토하다, 한때 내 '꿈'이 뮤지컬과 닿아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객관적으로 난 '뮤덕'은 아니다. 살면서 본 뮤지컬 공연이 몇 개 안 되고 같은 공연을 두 번 이상 본 적도 없다. 자주 보기엔 돈이 많이 드는 취미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난 뮤지컬을 보는 게 별로 즐겁지 않았다. (이 얘긴 나중에 다시.)


그러니 내가 뮤지컬을 하고 싶었던 건, 뮤지컬 관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또 좀 다른 성질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지원 에세이를 쓰며 발견했던 당시의 내 욕구는 ‘무대에서 노래하며 내 안의 뭔가를 밖으로 쏟아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제된 환경을 아예 다른 행성으로 옮겨 버리는 저 질문의 취지도 그것 아닐까 싶다. 나의 진정한 욕구를 발견하기 어렵게 하는 현실적 제약들을 상상 속에서나마 치워 주는 것. 그래서 나의 진짜 욕망이 어딜 향해 있는지 발견하도록 돕는 것.


외고를 졸업하고, 경제학을 전공하고,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던 스물일곱 살이 뮤지컬을 해 보려는 건 엉뚱한 행보로 보였지만, 또 어떻게 보면 오래 가졌던 열망에 따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의 '다른 행성'을 찾아갔다.

뉴욕필름아카데미 지하에 있었던 극장. 워크샵 마지막 쇼케이스 날 이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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