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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Dec 09. 2023

노래를 할 건데 뉴욕까지 가야 했냐고요?

겁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호기롭게 퇴사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 나도 K-20대 페르소나를 장착한 사람으로서 ‘뭘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어’ 병에 만성적으로 시달렸다. (내 경우 이 병은 초등학생 때 시작됐다.) 뮤지컬을 해 보겠다며 전 재산을 털어 미국을 향하던 걸음 역시 용기보단 절박함이었다.




노래를 하고 싶은데, 대한민국 땅에서 스물일곱 살이나 먹은 내가 뭐부터 해야 할지, 할 수 있기나 한지, 알 수가 없었다. 입시는 다시 할 돈도 시간도 없었다. 오디션을 보자니 실력에 대한 자신이 없었고 어떤 오디션이 있는지 가진 정보도 없었다.


일단 보컬학원부터 등록해 봤다. 수업은 유익하고 재밌었지만 명확한 목표 없이 수업과 연습만 하는 막연한 시스템이 지속가능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궤도에 올라타야 했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가족, 친구, 지인들의 '나'에 대한 예상치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덴 지나치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들은 나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늦바람 들어서 허황된 꿈을 꾸고...' 등등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남 눈치를 상당히 보는 성격으로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니,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한국 사회보다 나이에 조금이라도 둔감한 곳, 지금까지 나를 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내가 새로운 나처럼 굴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곳. 그래서 미국의 수업을 찾은 것이었다.




내 검색 키워드는 '성인을 위한', '4주', '뮤지컬', '입문 수업'이었다. 고등학생을 위한 여름방학 캠프는 많았지만 거기 등록할 순 없는 노릇이었고, 관련해서 어떤 배경도 없었으니 입문자도 들을 수 있는 과정이 필요했다.


4주는 당시 재정과 시간이 허락하는 최대치였다. 그 이상 큰 투자를 하기엔 내가 이걸 그만큼 좋아할지 혹은 잘할 수 있을지 예상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다른 길로 돌아오도록,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경험해 볼 방법이 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맨해튼의 뉴욕필름아카데미(New York Film Academy)다. 실무교육 중심의 사립 영화학교로, 4년제 학사과정과 그 이상의 학위과정, 2년 혹은 1년의 컨저바토리 과정, 4주 혹은 1주의 단기코스도 운영하고 있디. 원래 영화학교라 영화 관련 전공이 훨씬 많지만 뮤지컬 전공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브로드웨이가 지하철로 15분 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브로드웨이에서 배우, 연출, 음악감독 등으로 활동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강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현업에 가까운 생생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뒤엔 지원에 필요한 에세이를 써 보내고, 영상 오디션에 응시하고, 비자 발급을 위한 복잡다단한 과정을 했다. 학교의 담당자와 실시간으로 연락을 하며 '이 일이 진짜 일어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합격 통지가 오고, 필요한 서류가 나오고, 결제 완료 알림이 오면, 그때 잠깐 현실감이 들었다. '이 일이 진짜 일어나고 있구나.'


한국인 관광객은 ESTA(비자면제프로그램)만으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지만, 4주 이상의 과정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학생비자가 필요했다. 길게는 3개월까지 걸릴 수도, 심지어 거절될 수도 있다는 학생비자를, 개강 시기에 맞추려면 난 일주일 안에 받아야 했다.


일정을 당기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고 할 수 있는 게 더 없는 상태에서 그저 기도를 했다. 출발하는 비행기는 목요일 저녁. 승인된 비자가 찍힌 여권이 내 손에 들어온 건, 출국을 하루 앞둔 수요일 오후였다.




요컨대, 노래 좀 해보겠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간 모은 돈을 다 쓰고 힘겹게 비자를 받아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는 것이어야 했던 이유는, 내가 눈치를 많이 보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서였던 것이다. 종잡을 수 없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행보가 나도 신기했다. 그럼에도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장 큰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으니까.

학교 근처 건물에 꽂혀 있었던 뉴욕필름아카데미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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