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악당 두목의 의뢰를 받았다>에서 드러나는 클리셰의 변형
콘텐츠에는 그 콘텐츠 시장 전반에 깔린 고유의 문법이 있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어색할 수 있으나 그 콘텐츠 시장의 기존 향유층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는 소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웹소설이나 웹툰같은 웹콘텐츠 전반에서 자주 쓰이는 '회빙환'이 있다. 회귀, 빙의, 환생의 줄임말인 이것은 일본의 서브컬쳐와 우리나라의 웹콘텐츠 전반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회귀'는 과거에 후회를 남겨둔 주인공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미래 지식을 알고 있는 채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 '빙의'는 자신이 즐겨보던 작품 속의 인물이나 혹은 타인의 몸에 내가 들어가게 되어 기존의 알고 있던 등장인물과 작품의 정보를 토대로 살아가는 것. '환생'은 주인공의 모종의 이유로 죽으면서, 다른 인물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소재가 자주 쓰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종종 독자의 심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소재들은 서브컬쳐와 웹콘텐츠를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흔하게 보는 소재다.
종종 이 세 가지가 섞이면서, '환생'을 통해 작품 속 인물로 태어나기도 하고, 과거의 모 시점에서 환생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이용하는 등의 변주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기존 향유층은 콘텐츠의 제목이나 작품 소개에 이런 키워드가 들어있는 것만으로 작품에 대한 대략의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이 갖고 있는 특성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소재들은 최근에는 웹소설이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등이 나오며 그런 고유의 문법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웹소설로 유행했던 '재벌집 막내아들'이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그 외에도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가 나오면서 일반 대중들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여성향 웹소설로 여성들이 주 향유층을 이루고 있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에도 그 고유의 문법이 적용된다. 주로 문장형 제목을 통해 작품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드는만큼, 제목에 들어가는 키워드에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 웹소설에서 자주 쓰이는 회빙환을 활용해 '00에 빙의했다'던가 '00으로 환생했다', '이번 생은~'으로 시작하는 제목 속에 '악녀'라던가, '남주', '섭남(서브남주의 줄임말)' 등 보통 콘텐츠 향유층이 쓰는 단어가 제목에 쓰일 경우 이런 문법에 익숙해진 기존 독자는 이것을 파악하기 쉬워진다.
주인공이 어떤 작품의 악역 인물에 빙의하면서 벌어지는 일, 혹은 기존 작품 속에서는 작품의 여주인공과 이어지지 못했던 서브남주가 주인공과 연애하게 되는 일 등등의 상황은 이제 독자들 사이에서는 클리셰가 되었다. 키워드 자체가 클리셰가 되었으니, 비슷한 재미를 찾는 독자들은 원하는 작품을 찾기가 쉬워졌지만 반면 이런 반복되는 키워드로 비슷하게 진행되는 웹소설 전개에 피로를 느끼는 독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리셰를 조금 꼬아서 약간의 새로운 맛을 첨가한 웹소설은 그런 독자들을 끌어모으며 새로운 클리셰 유형의 하나로 탄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는 한때 '북부대공'이라는 키워드의 남자주인공이 인기를 끌었다. 제국의 북쪽, 춥고 위험한 국경을 지키는 차갑고 냉정한 흑발의 남자.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이런 남자가 작품의 여자주인공에게만은 사랑에 빠진 순정남이 되는, 혹은 무뚝뚝함 속에서 달콤한 면모를 보여주는 모습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이런 작품에서 남자주인공과 대비되게 만들어진 '서브남주'는 일부 독자들로 하여금 '서브병'에 걸리게 만들었다. 남자주인공과 대비되도록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다정한 남자. 남자주인공과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여자주인공을 헌신적으로 위로해주지만 결국 사랑에는 실패하는 남자... '갈발(갈색 머리) 섭남'이 하나의 대명사처럼 활용되었다.
그리고 여주에게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남주에 질리는 독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다정한 순정남주가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유행은 반복된다고 클리셰에서 약간의 변주를 준 것이 새롭게 각광받은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로판에서 소위 '육아물'이라고 불리는 하위 장르가 있다. 주인공이 어린 아기일 때부터 시작되는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는데, 대개 가족과 주변인에게 사랑받으며 어릴 때 우연하게 만나는 소꿉친구와 그대로 연애-결혼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필요한 갈등과 사건, 그리고 이런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주인공이 어느정도의 해결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가령 특별한 능력을 가졌거나, 머리가 좋거나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이 육아물에서 주인공은 '성인이 되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회귀'했거나, '성인이 어린 아이의 몸에 빙의'했거나 '어떤 성인이 죽고 어린 아이로 다시 환생'하는 경우가 많다. 즉, 유명한 애니메이션인 명탐정 코난처럼 되는 것이다. 몸은 어려졌지만 머리는 그대로.
그런 어린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대개 과거에는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을 해결한다거나, 아니면 학대하던 가족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어버리며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속이 뻥 뚫릴 것같은 사이다를 준다거나, 나쁘게 굴었던 가족들이 후회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소재가 되었던간에 공급이 많아지면 독자들이 반복되는 클리셰에 점점 호응이 적어지는 것처럼 육아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독자들은 아기들 특유의 혀 짧은 소리를 낼 뿐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어린아이, 어린이의 몸으로 전혀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을 케어하며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피로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작가님이 어린애를 본 적이 없으신듯..." 같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면 말 다 했다.
클리셰는 잘 먹히기 때문에 클리셰라고는 하지만, 클리셰에도 다양한 변주가 필요한 법이다. 똑같은 파스타 면을 들고도 어떤 재료를 넣느냐로 어떤 파스타를 만드는지가 달라지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현재 연재를 진행 중인 밤비 작가의 「악당 두목의 의뢰를 받았다」 는 그런 ‘진짜 어린아이’를 원하는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야, 배고프냐?”
사흘을 쫄딱 굶은 내 앞에 말랑말랑한 흰 빵이 나타났다.
팔뚝만 한 빵을 그 자리에서 해치운 내게 악당이 비열하게 웃었다.
“먹었으면 이제 대화를 해볼까?”
빵 하나에 악당에게 인생이 저당 잡혔다.
-하략-
위의 내용은 작품 소개의 일부다.
작품 소개를 읽은 예비 독자는 작품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은 어린아이고 주인공을 돌보게 될 ‘보호자’는 가족이 아닌 타인인 ‘악당’이다. 새롭게 바뀌는 환경 속에서 주인공은 사랑을 받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주인공이 아이인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호기심을 갖고 접근할 수 있다.
주인공인 ‘브로디’는 보육원의 대장 어린이다. 후원금을 횡령하고 아이들을 동냥하러 내보내는 원장 아래에서 어른에게 보호받지 못한 브로디는 그만큼 철이 일찍 들 수밖에 없었던 어린이다. 브로디에게는 다른 것에 가려진 것도 전부 꿰뚫어 볼 수 있는 ‘투시’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고, 이런 투시 능력의 도움이 필요했던 ‘이클리스’는 브로디를 찾아내 거래를 제안한다. 브로디는 이클리스의 의뢰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그 대가로 아이들을 괴롭히던 원장을 쫓아내고 보육원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성공한다.
브로디는 그 후 이클리스가 운영하는 체일스 길드의 입사 제안을 받고, 동냥 없이 큰돈을 벌어 보육원의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으로 길드에 입사한다.
아이는 아이다울 때 가장 사랑스럽다. 밤비 작가님이 조형하는 ‘어린이’는 단순히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어른이 아니다. 단순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엉뚱한 발상을 하며, 달콤한 간식과 어른의 칭찬을 좋아한다. 힘든 환경 속에서 자라 조금 이르게 철이 든 부분도 있지만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이다운 애정을 내민다. 아이가 아이다운 모습을 보일 때 독자들은 댓글에서 힐링을 외치며 울게 된다.
나는 밤비 작가님의 이전 작품인 「악당 삼촌이랑 살아요」 도 재밌게 읽었던 독자로서, 작가님이 조형하는 어린 주인공의 모습과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작품을 유추할 수 있는 키워드로 이루어졌지만, 클리셰적으로 사용되는 키워드를 피하고 작품의 주요 요소를 일부 감춘 제목 또한 마음에 든다. 작품의 제목과 줄거리 소개를 보았을 때 어떤 내용일지 파악하고 이것이 취향일 독자를 끌어들이지만, ‘주인공의 투시 능력’이나 ‘주인공의 소속이 가진 영향력’과 같은 작품의 주요 설정은 읽는 사람이 찾아낼 수 있는 재미 요소로 남겼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작품은 없다. 기존의 클리셰를 조금씩 비틀고 약간의 새로움을 추가하는 것으로도 신선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웹소설 시장에서 어느 소재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그대로 활용해서는 기존 작품의 답습이 이루어질 뿐이다. 자신만의 새로움을 연구하고 작품에 녹여낸다면 늘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에 반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