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6일, 정부는 국내 재단이 전범 기업을 대신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제3자 변제 안을 발표했다.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2018년 대법원판결을 이행하기 위한 ‘해법’이라고 한다. 일본 측에서는 가해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으며, 일본 기업이 재단 기부에 참여할지도 미지수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은 지난 9일, ‘강제 노동’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측의 인정도 사과도 없이, 배상의 형식도 아닌 돈을 한국에서 대신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다. 굴욕적인 방안이 아닐 수 없다. 강제 징용 생존 피해자들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그런 돈은 받지 않겠다며, 제3자 변제를 단호히 거부했다. 가해 기업과 일본의 사죄가 먼저라는 입장이다.
일본 측에서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정하고 사과하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지는 일은 손실이 된다는 판단하에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들의 입장은 뻔하다. 반대로 피해자 측의 입장에 관해서는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차라리 보상을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을 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일이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피해자가 사과받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겠으나, 그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파트 2가 공개된, 학교 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의 작가 김은숙은 작품을 집필하며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현실적인 보상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한다는 점이 의아했고, 그 사과를 통해서 이들이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사과하고 반성할 줄 아는 이들은 애초에 잔혹한 폭력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던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 최우선시되는 이유가 궁금했다는 말일 테다. 그러다 그는 가해자의 사죄를 통해 피해자들이 무엇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되찾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폭력의 순간에 잃어버렸던 존엄과 명예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드라마의 제목을 ‘더 글로리’로 지었다고 밝혔다.
가해자에게 사과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용서를 구해야 할 죄를 저질렀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피해자는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결코 훼손되고 짓이겨질 수 없는, 어떤 순간에도 폭력을 당해선 안 되는 존엄한 존재임을 보증받는다. 그 과정 없이는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강혜빈의 시 '홀로그램'(<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2020)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면 안 돼/괜찮아도 되는 일이 없는데/괜찮다고 말하면/용서를 해야 할 것 같고/용서를 하면/우리가 졌다는 미신이/정말 사실이 되고/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되뇌는 화자는 결연한 태도를 보이지만, 한편으로 줄임표 속에서 망설이고 있다. 오랜 세월 괜찮음을 강요받으며 고된 싸움을 이어왔을, 약해지고 무뎌진 이의 짙은 회의감이 전해지는 듯하다. 사과받지 않으면, 피해자는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는 그런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또다시 일어나더라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되는, 반드시 받아내야 하는 사과가 있는 것이다. 괜찮아지고 싶은, 외면하고 싶은 순간을 견디며, 절대로 괜찮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마음을 다잡는 이들이 있다. 그 힘든 시간을 버텨온 이들에게 돌려줄 말이 ‘세월이 흘렀고, 국가 관계도 회복해야 하니, 괜찮다고 말하라’는 끔찍한 폭언이 아니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