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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웅 Aug 09. 2023

애도에 저항하는 애도


올해 1월에야 ‘오문교 이등중사’는 그 유해의 신원이 밝혀져 6‧25전쟁(1950~1953) 당시 전사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1) 죽음조차 유예된 이들, 한국사에는 그런 이들이 유난히 많다. 일제 강점과 독립운동, 분단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항쟁, 독재정권의 폭압과 그에 맞선 민주화운동, 그 반목들 속에서 죽음은 되풀이되었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기에 역사적 비극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데 어려움이 있다. 분단이 폭력의 명분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반공’을 국가 의제로 내걸었다. 공산주의자는 적으로 상정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죽여도 되는, 아니 죽여 마땅한 ‘빨갱이’로 전락했다. 더군다나 빨갱이이기에 처단당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폭력의 대상이 된 이들이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로 간주되었다.2) 따라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인 듯 보이는 사상이나 이념은 실상 이 모든 폭력과 무관하다. 두려움과 적의를 극대화하고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학살은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죽임당한 이들은 빨갱이로 간주되었기에 이 죽음을 추모하는 자 또한 반동분자로 내몰렸다. 어떤 죽음이 애도할만하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 기억될 기회조차 박탈당했을 때, 한국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나. 아니 무엇을 말해야 하나.


국가가 대량 학살의 기억을 통제하는 동안 한국문학은 ‘대항기억(counter-memory)’으로서 기능했다. 은폐된 죽음을 기록하여 참혹한 실상을 알렸으며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이를 서사화하고 더 가까이서 감각할 수 있도록 구체화했다. 더하여 한국문학은 애도와도 싸워내야 했다. 예로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침묵을 강요당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당시 이를 적극적으로 애도하며 정치에 활용했다. 민간인을 학살하도록 허락한 주체가 이를 애도했다니 이 무슨 모순일까? 이승만 정권은 희생된 군경을 애도하는 추모제를 지내며 대중을 결속하고 단속했다.3) 애도를 표했으나 사실을 왜곡하여, 빨갱이들에 의해 무고한 국민이 희생되었다는 거짓된 서사를 만들었고, 선별된 집단만을 애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문학은 이러한 각색된 애도를 돕는 데 활용되기도 했다. 여순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파견된 ‘문인조사반’의 대다수 작가가 반란군을 ‘식인귀’, ‘극악무도한 짐승’ 등에 빗대며 절대 ‘악’이자 비인간으로 묘사했다.4) 이때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선량한 시민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절멸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하는 데 문학 또한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비극적인 죽음들을 애도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문학은 크게 세 가지 애도에 모두 저항하며 애도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는, 왜곡된 애도에 대한 저항이다. 기록을 조작하고, 사건을 편집하여 누군가의 죽음을 악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다각도로 살피고, 은폐된 부분을 밝혀내어 빠짐없이 기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작가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실로 「순이 삼촌」(1978)을 집필하여 제주 4‧3 사건을 알린 현기영은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둘째는, 선별적 애도를 거부하는 애도다. 문학은 덜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후순위로 밀려나 기억될 기회를 잃은 이름들을 기록하고 ‘기억할만하다’는 평가 자체를 의문시해야 한다. 예로, 다수의 문학작품들은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향한 숭고한 일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하여,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참상을 고발하는 데 주력했다. 희생자들이 폭도로 매도되었기 때문에 이를 정정하는 일은 분명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였다. 다만 이들의 신념이 ‘순수’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일이 우선시되었기에 유흥업에 종사했던 여성들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했다. 고영서의 시 「아마조네스 여인들처럼」, 이현석의 소설 「너를 따라가면」은 이 사실을 다루며, 숨은 주역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셋째로, 민족주의적인 애도에서 벗어난 애도가 필요하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이들의 피해 사실을 민족주의 담론 안에서 논의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었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그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러한 애도 방식을 택한 것이겠다. 이는 일본군에 의해 고통받은 역사를 기억하고, 피해자의 아픔에 감응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자칫 일본군 ‘위안부’를 민족의 수난자라는 상징적인 자리에 고정해버릴 위험이 있다. 이는 개별적 존재들을 추상화할 뿐 아니라 같은 민족만이 이에 대한 애도에 동참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양산할 수 있다. 김숨은 이를 경계하며,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는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과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의 형식에서 벗어나 한 인물의 증언을 담아낸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를 집필했다. 성해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오즈’라는 개성적 인물을 창조하고 그가 고유한 취향을 지닌 존재임을 묘사했다.(「오즈」,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고정된 방식의 애도에 저항하며 애도를 확장해나가는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를 살펴보자. 소설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소설가인 ‘경하’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해 입원한 친구 ‘인선’을 대신해 인선의 제주 집에 홀로 남은 앵무새 ‘아마’를 살리러 가지만, 실패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때, 경하가 전작에서 대상으로 삼았던 5․18 민주화운동과 인선이 다큐멘터리에 담아낸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생존자들의 이야기,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은 제주 4․3과 외삼촌의 유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이 끼어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무엇도 사실로 확정할 수 없도록 불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우선 소설 속에 재현된 제주 4․3의 경우, 조각조각으로 남은 여러 증언들이 맞물리며 단편적인 사건의 그림자만이 어렴풋이 드러날 뿐, 확실한 기록이나 객관적인 증거들은 제시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할 수 없고, 기록은 조작되거나 소멸되었다. 생존자는 목격자이지만,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을 경험한 피해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 고통으로 인해 PTSD에 시달리는 이들은 환각 증세를 보이거나, 이미 치매에 걸렸거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아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다. 따라서 이들의 증언은 맥락 없이 토막만 남아 뒤죽박죽 섞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설의 초점 화자인 경하는, 이를 건네 들은 인선을 한 번 더 거치므로, 인선의 언어로 재구성한 증언을 듣게 된다. 설상가상 경하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인선은 경하가 죽지 않았다면 환시거나 영혼일 것이고, 경하가 죽었다면 죽은 이후의 경하가 환상 속에 마주한 대상이다. 모든 기억들은 부옇게 시야를 차단하는 눈보라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 희미한 윤곽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가장 선명하고 현실적인, 그러므로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고통은 봉합수술을 받은 인선이 3분마다 바늘로 환부를 찔리며 느끼는 통각이다. 그로 인해 비극적인 사건들이 상대적으로 배경으로 밀려나 버리며, 작품의 균형이 기운다는 평자들의 지적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이 역사적 비극보다 인선이 ‘지금’ 겪는 고통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이후’를 살아가는 세대가 보이는 태도를 되비추는 역할을 한다. 비극적인 역사를 되새기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한다 해도, 나의 신체에 전해지는 고통이 나와 훨씬 가깝기 때문에 그 감각이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비극들은 하나의 통일성 있는 이야기로 완결되지 못한 흐릿한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기에, 경하가 그랬듯, 이에 상상력을 보태어 가까스로 추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누락되어 있어 명확한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 비극은 현실에서도 후순위가 된다. 인선이 겪는 고통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강조하는 서술은 오히려 ‘애도의 어려움’을 전경화하여 그 핍진성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또한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지 않게 계속 피를 내고, 고통을 느끼게 하는 과정은 잘린 신경 위쪽이 죽지 않도록 막는 시술이다. 삼 분마다 바늘에 찔리며 아파하는 일을 앞으로 삼 주 정도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선에게도 막막한 것이므로, 그는 진심으로 포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의사는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42쪽) 말한다. 당장의 고통을 피하고자 시술을 중단할 경우, 환지통을 평생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애도의 문제를 빗대는 알레고리로도 기능한다. 비극을 마주하는 일은 지독한 내상을 남긴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가 자행한 끔찍한 폭력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소설로 써내는 일은 경하에게,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고통을 남겼다. 이후 인선과 경하가 마주한 제주의 참상 또한 이들에게 큰 슬픔을 안긴다. 그러나 지금 직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평생, 썩어버린 뿌리를 느끼며 두고두고 아파해야 한다. 애도를 포기할 경우, 침묵하고 외면했다는 죄책감은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경고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한강은 ‘민족’이라는 추상화된 집단으로의 결속이 아닌, ‘고통’이라는 좀 더 직접적이며, 누구라도 경험하게 되는 감각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고안한다. “속솜허라”(159쪽)라는, 들키지 않도록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말을, 인선은 “솜 속에 들어온 것 같”(319쪽)다라며, 눈의 부드러운 촉각을 이르는 말로 변주해낸다. 이는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서 눈은 얼어붙지만, 산 사람의 따뜻한 얼굴 위로 내린 눈은 녹게 된다는, 소설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묘사를 환기한다. 눈은 녹아 ‘선득한 물방울이 되어 눈시울로’(125쪽) 스미고, 우리는 타자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산 자의 온기는 얼어붙은 것들을 녹여 부드럽게 만들 수 있으며, 녹은 눈은 눈물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눈송이가 녹는다는 것은 결정을 이룬 숱한 결속이 풀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속을 허물며 한강은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친구가 키우던 앵무새의 죽음’이 그 경중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같은 부피를 지닌 상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사유로 나아간다. 경하는 아마의 죽음에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을 느낀다.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152쪽)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자신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 일보다 젊은 여자가 죽은 젖먹이를 경찰에게 빼앗기는 장면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는, 한 생존자의 증언과도 맥을 같이 한다.


호송차 여러 대에 올라타기 시작하는데 줄 뒤쪽에서 젊은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을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할 고문 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266~267쪽)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中


일면식도 없던 여자가 죽은 자식을 빼앗길 때, 끌려 가 고초를 겪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 아파한다. 그들은 여자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끼며 함께 슬퍼한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며, 저마다의 상이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렇게 한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 절대적 타자를 향한 애도는 한층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제주 4․3이나 5․18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할 때면, ‘한 핏줄’, ‘같은 민족’ 등의 수식어를 동원한다. ‘우리’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애도에 동참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 하더라도, 이 또한 배제의 원리를 답습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로의 결속이 가능할 때만 애도가 가능해진다는 제약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짓는 데서 출발하는 애도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이토록 난삽하고 불분명한 서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한강은 고통을 매개로 하여 일면식이 없는 타자, 민족으로 엮이지 않는 타자, 나와 무관한 타자의 아픔까지도 애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이는 역사적 비극을 겪은 이들, 더 넓게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던 애도를 인간과 구별된 타자로 여겨져 온 동물에게까지 넓혀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성해나의 소설 「오즈」는 애도와 치유의 수단으로 ‘문신’을 활용한다. 문신은 바늘로 상처를 낸 뒤 그곳에 잉크를 넣어 새로운 그림이나 문구를 새기는 것이다. 무언가를 새기려면, 무언가를 긁어내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는 소설 속에서 ‘하라’에게 ‘오즈’가 선물한 ‘스크래치 북’과도 같다. 캄캄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을 손톱으로 긁어내면 알록달록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은폐와 왜곡, 선별과 상징화를 긁어내어 잊힌 이름들에 다채로운 색을 찾아주기 위해 더 자주 이야기하고,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좁은 의미의 애도를 탈각하고 더 넓고 깊은 애도를 창출하기 위해 오늘도 새로운 문학이 쓰이고 있을 테다.



1) 박은경, 「아들 보지 못하고 화살머리고지에서 떠난 오문교 이등중사 신원 확인」, 『경향신문』, 2023.1.18.

2)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46~47쪽.

3) 김봉국, 「이승만 정부 초기 애도-원호정치 : 애도의 독점과 균열, 그리고 그 양가성」, 이영진 외, 『애도의 정치학 : 근현대 동아시아의 죽음과 기억』, 길, 2017, 132~135쪽

4) 김득중, 앞의 책, 402~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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