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웅 Aug 14. 2023

빛을 나누어도 빛

영화 <카트>와 소설 <빛을 걷으면 빛>, 그리고 노동자들

나라면 꿈도 못 꿀 일을 네 덕분에 했어.


영화 <카트>(2014)에서 ‘선희’가 ‘혜미’에게 전화로 건네는 말이다. 이들은 ‘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다. 마트로부터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고 이에 항의하며 노조를 결성해 시위를 이어 나가던 혜미는 어린 아들이 시위 현장에서 다치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사측의 복귀 권유를 수락하게 된다. 선희의 입장에서는 노조활동을 하던 동지들을 저버리고 다시 마트로 돌아간 혜미가 배신자로 느껴질 수 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먼저 의견을 제기한 사람도, 노동조합 가입신청서를 돌린 이도 모두 ‘혜미’였기 때문이다. 혜미는 여성 노동자들을 이끌며, 노동조합에는 회사와 협상할 대표가 필요하다는 점, 파업 중에 대체인력을 쓰는 것은 불법이라는 점 등을 알려준다. 선희는 혜미를 통해서 무엇이 불법인지, 자신의 정당한 권리는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어떤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를 배워나간다. 그런 선희는 혜미의 입장을 이해하며, 그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혜미를 통해 자신이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에 감사를 전한다.



부당 해고를 통보받기 전, 선희는 갑작스러운 연장 근무 요청에 수당 없이도 언제나 응하던 직원이었다. 혜미가 선희를 비롯한 다양한 나이대의,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여성 노동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부당한 일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인식이자 주어진 권리가 있음을 자각하는 법이다. 이는 ‘계몽’에 가깝다. 어두웠던 곳에 빛을 비추어 그것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돕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이성의 영역을 각성시킨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므로, 지식인이 비지식인에게 전하는 형태로 자주 그려져 왔다. 따라서 계몽은 지식인 계층이 노동자 계층에게 행하는 교육의 일환으로 인식되어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같은 고충을 겪었기에 이를 배우지 않아도 감각으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 그 설움을 공유하며 서로가 처한 상황을 자각하게 하는 계몽 또한 가능하다. <카트> 속 혜미가 선희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형식의 계몽은 그 당사자성으로 인해 더욱 강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는 성해나의 소설 「김일성이 죽던 해」 속 ‘순이’가 ‘상희 언니’를 통해 불합리하다는 감각을 배워나가는 장면과 겹친다.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이 소설의 외부 이야기는 딸의 시선에서, 내부 이야기는 엄마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정확히는 딸 ‘해원’이 우연히 엄마 ‘순이’의 일기를 발견하고 읽게 되는 구성이다. 내부 이야기의 서술자인 ‘나’(순이)는 90년대 여성 공장노동자로 소데우라(소매 안쪽에 넣는 안감)를 손바느질하는 일을 한다. ‘나’와 여공들은 대소변을 참아가며 일하도록 강요받지만, 그것이 휴식 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부당한 노동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90년대는 동남아로 외주가 넘어가는 시기였기에 일할 곳이 많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일자리라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는 상희 언니와 교류하기 전까지 ‘권리란 무겁고 성가시고 까다로운 것’(365쪽)이라고 여긴다. 권리나 투쟁, 자의와 같은 단어들이 생경한 ‘나’는 그런 “언어를 배워본 적”(365쪽) 없었다고 고백한다. 권리를 누려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권리와 관련한 언어조차 생소한 것이다. 언제 실직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타의를 살피는 편이 익숙한 공장 노동자들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해본 적이 없기에 자의의 중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러한 20대 여성 노동자인 ‘나’가 불의란 무엇인지, 그 반대급부로서의 정의란 무엇인지 지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지식인 혹은 교육자나 투쟁가에 의해서가 아니다. ‘나’와 같은 노동자를 통해서다.


“생리휴가 만들어주세요.”(365쪽)라고 반장에게 요구하는 상희를 보며, 직공들은 그 당당한 요청이 아닌, ‘생리휴가’라는 처음 듣는 단어에 놀란다. 생리대를 갈 휴식 시간조차 잘 보장되지 않아 “패드가 눅눅함을 넘어 질척해”(364쪽)지도록 쉬지 않고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그러한 환경이 개선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열악한 환경이더라도 그것은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이자 기회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나’가 ‘생리휴가’와 같은 권리를 배우게 되는 것은 언니의 말이자 요구를 통해서가 아니다. 언니의 요구가 어떤 방식으로 묵살당하는지, 그 폭력을 생생히 경험하면서다. 반장이 던진 재떨이에 맞은 언니는 갈비뼈에 금이 간다. 이 사건을 목격하며 ‘나’는 권리를 찾기 위한 험난한 싸움, 즉 투쟁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연대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야근 수당 없는 야근을 거부하는 것은 언니의 정당한 권리이지만, “언니 몫은 남은 직공들에게 자연히 떠넘겨”(370쪽)졌으므로, 언니에게로 노동자들의 원망이 향하게 된다.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언니의 올곧은 태도는 식구들을 건사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해고될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남은 노동자들에게는 동료에게 가중될 노동을 모른 체 하는 이기적인 태도로 왜곡되어 비치기 때문이다. 영화 <카트>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측이 노동조합의 결속을 깨기 위해 전략적으로 몇몇 직원에게만 복직을 권유하자 조합원들 사이에도 균열이 생긴다. 두 작품은 이음매 없는 무결한 연대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짚어낸다.


더불어 노동운동은 강력한 신념과 정의감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린다. <카트>에는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져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노조에 가입하는 ‘미진’이, 「김일성이 죽던 해」에는 불합리한 노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을 잘 대해준 인물에게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노동자 글쓰기 모임에 가입하게 되는 ‘순이’가 등장하며, 어떤 계기, 어떤 마음으로든 노동운동에 합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순결한 피해자이자 완전무결한 노동자를 요구해서는 안 되며, 어떤 노동자든 자신의 권리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물론 두 작품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는 관철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나’와 문덕, 상희 언니가 꾸려가던 노동자 글쓰기 모임은 반장에게 적발되어 무산되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 <카트>는 혜미와 선희를 비롯한 노조원들이 시위 진압대에 맞서 결의에 찬 모습으로 카트를 밀고 나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직전에, 노조원 대다수가 연행되어 경찰차에 타고 있는 모습, 수적으로 밀리는 모습 등이 배치되어있기에, 명확한 결말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슬프게 예감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끝난 후, 검은 화면에 뜨는 “파업을 주도했던 노조지도부들이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조합원 전원은 일터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라는 문구 또한 영화의 모티브가 된 이랜드 노조원들의 투쟁이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완전히 승리하지는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두 작품은 시위와 투쟁, 노동자들의 글쓰기 모임의 성패가 아니라 그 이후를 이야기한다. 투쟁의 가시적인 결과라는 일시적인 결말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파장과 그 파급력이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바꿀 수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작가가 전경화하는 것은 문덕과 순이, 상희 언니가 적어낸 노동자의 설움과 애환이 아니다. 이들이 써낸 글이 어떤 내용인지 대략적으로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 글을 소설에 싣지는 않는다. 대신 성해나가 계속 기록하려 하는 것은 독자이기를 자처했던 상희 언니가 그들의 글에 달아주던 댓글, “앞으로도 계속 써주세요”(376쪽)라는 말이다. 이는 이후 언니가 남긴 글에서도 발견된다.


문덕아, 그리고 순이야 너희들은 계속 글을 써, 우리의 이야기를 끝까지 써줘. (390쪽)


언제나 움츠려 살던 ‘나’는 그 말에 힘을 내어 아이의 “여린 살을 뚫고 올라온 작고 흰 이”(390쪽)처럼 무른 마음 사이로 단단한 용기가 돋던 그 시절을 시로 기록한다. 이때 ‘나’는 늘 빠져있다고 지적받던 ‘우리’ 이야기를 처음으로 써낸다. ‘나’는 자신이 받았던 ‘계속 써 달라’라는 격려이자 요청을 딸에게 돌려준다. “앞으로도 계속 써주세요.”(392쪽) 이것은 소설가가 자신에게 건네는 자기 암시가 되기도 한다. 결국은 실패하게 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이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겠노라는 다짐인 셈이다. 이는 ‘쓰기’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투지를 가지고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며, 불의에 항거하는 행위를 ‘계속해 달라’는 메시지로 남는다.


그 계속됨, 즉 연속성을 향한 뜨거운 마음들은 이후, 엄마인 순이가 이십 년을 근속한 학습지 회사에서 받아 마땅하나 지급되지 않던 퇴직금을 받아내도록 만든다. 순이에게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딸은 이제 성장해서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는 권리를 알려주는 사람이 된다. 반대로 딸은 엄마가 겪은 일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실패하더라도 계속 쓰겠다는 의기를 다지게 된다. 세대를 넘어서 불의에 저항하는 감각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단선적으로 읽히던 계몽이 어디까지 뻗어나가고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카트>에서 혜미를 통해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희가 제대로 목소리 내는 인물로 성장하는 것과 겹쳐볼 수 있다. 아들 ‘태영’이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 수당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선희는 엄마로서, 같은 노동자로서 고용주에게 “일을 시켰으면 제대로 월급을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러한 엄마의 모습에 감화받은 아들은 엄마의 시위를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지해주며, 자신이 경험했던 억울한 감정을 꺼내어 선희에게 공감해준다. 노동자가 노동자에게 권리를 향한 의지를 직접 가르쳐 주는 과정은 자신이 가진 빛을 나누어주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빛을 걷어도 빛이 계속되듯이, 빛을 나누어도 빛은 더욱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전 07화 애도에 저항하는 애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