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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r 21. 2024

악필인데도 손으로 써 보라고?

손글씨의 효용

나는 악필 중에 악필이다. 한때는 ‘천재는 악필이다’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물론 그 역이 성립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내가 진짜 천재일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악필임을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아왔다.



사실 악필이 된 근본적인 원인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연필 잡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데 있다. 연필을 잘못 잡고 쓰다 보니, 글씨가 예쁘지 않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금만 써도 팔이 아파서 오래 쓰지 못한다. 많은 양의 글을 쓸 수가 없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은 대부분 객관식이고 주관식도 단답형이어서 큰 문제없이 버틸 수 있었다.



처음으로 위기를 느낀 건 막 대학생이 되었을 때다. 수업마다 요구하는 리포트는 당시 막 등장한 도트 프린터를 빌려 위기를 모면했지만, '~~를 논하시오' 류의 시험 답안을 써야 할 때마다 막막했다. 열심히 답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가락과 손목이 아파왔다. 중간중간 손을 털고 손가락 마사지를 하며 달래 보지만, 이미 내 손은 마라톤 완주라도 마친 사람처럼 지쳐 버렸다. 이미 쓴 답안도 삐뚤빼뚤하게 쓴 글씨를 교수님이 과연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은 태산.


작가로 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노트북 컴퓨터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한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작고 초라하지만 노트북 컴퓨터가 있었다.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수시로 메모하고 매일 뭔가를 끼적여야 하지만, 나는 메모지나 수첩 대신 에버노트나 노션 같은 앱을 사용한다. 


손글씨와는 영영 작별을 고하고도 글을 쓰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팔도 아프고, 내 글씨를 내가 알아볼 수 없는데 왜 손으로 써야 해? 절대 손으로 쓰지 않을 거야. 하지만 손글씨와 헤어지고 작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첫 글쓰기는 '모닝 페이지'를 쓰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모닝 페이지를 권한 줄리아 카메론도 모닝 페이지를 손으로 쓸 것을 권했다. 노트를 펴고 종이의 색깔과 질감을 느끼며 한정된 그 노트의 여백에 내 손을 움직여 뭔가를 써내려 가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건 디지털 공간에 타자를 치는 것과는 완전 다른 무엇이다. 내 눈과 코가, 내 손끝이 직접 느끼며 움직이는 순간,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그 문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스마트 폰 같은 디지털 매체에 얼마나 매여 살고 있나. 텅 빈 노트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삐뚤빼뚤 못난 글씨라도 좋고, 그림을 잘 못 그려 멋지게 꾸미지 못해도 관계없다. 다이어리라 부르든, 노트라 부르든 관계없이, 매일 그저 한 페이지라도 좋으니 내 몸으로 직접 뭔가를 써보기로 했다. 손으로 뭔가를 쓰고 그림으로써 잊고 있던 내 감각을 조금씩 되살려내고 싶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서.



택배가 도착했다. 두근두근 포장을 풀었다. 주문한 만년필이 도착했다. 손글씨를 제대로 쓰려면 만년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당장 써보고 싶었지만, 잉크를 주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디지털화된 신식 인간도 못 되지만, 아날로그의 품위를 지니기에도 한참 모자란 인간이다.) 만년필 설명서를 읽다 보니 겁이 덜컥 났다. 잉크를 갈아 주고, 수시로 만년필 세척도 해줘야 한다니. 만년필은 잘 안 나오면 휙 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수 있는 볼펜과는 차원이 다른 관심을 요구했다. 손글씨로 직접 적은 노트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 휙 버릴 수 없는 것처럼.



겁이 나는 만큼 설렘과 기대도 있다. 소모되고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어질 그런 값싼 볼펜 같은 글 대신 소중히 여기며 오래오래 두고 쓰는 만년필 같은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 같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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