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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09. 2024

닥치고 써라! 글 쓰기 좋은 날이나 장소 같은 건 없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핑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시답지 않은 글을 끼적이긴 했지만, 내가 쓰고도 진부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그나마도 진득이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쓸 만한 상황이 오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101가지라도 댈 수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온갖 집안일에 눈에 들어온다


출퇴근하는 다른 직장인처럼 일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면 좋을 텐데, 집에서 글을 쓰기 위해 앉아 있다 보면 식구들의 필요가 수시로 눈에 띈다. 식구들이 집에 없을 때면 가구나 빨랫감 같은 무생물마저 내게 뭔가를 요구한다. 한두 줄 쓰기도 전에 한숨을 쉬며 부산하게 집안일을 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나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제대로 글을 쓰려면 혼자 있어야 하고, 식구들과 집안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회사에 급한 회의가 잡혀 계획대로 출발할 수 없다는 남편의 통보에 기뻐한 건 그 때문이었다. 드디어 혼자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에.


모간산으로 시외버스 타고 혼자 떠났다


숙소는 깨끗하고 아늑했다. 연휴라 길이 막혀 시외버스에 여섯 시간이나 갇혀 있었다는 사실도 금세 잊었다. 테라스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산속 경치를 맘껏 감상할 수도 있다. 드디어 내게도 집필 여행의 기회가 오는구나, 잔뜩 부풀었다.


중국 저장성 모간산에 있던 숙소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숙소 안에는 책상이나 의자가 없다. 침대에 베개를 받치고 기대앉았다. 등이 불편해 베개 두 개를 받쳐 보았다. 무릎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불편하다. 금세 허리가 뻐근해진다. 유일하게 의자가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잠깐 앉아 있으니 바람이 차다. 산속이라 도심보다는 확실히 기온이 낮다. 다시 방에 들어가 재킷을 꺼내 걸쳤다. 등나무로 짠 의자는 이곳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렸지만, 앉아 보니 차고, 따갑고, 불편하다. 테이블도 작은 원형 티테이블이라 노트북을 놓고 사용하기에는 작고 낮았다. 결국 의자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노트북을 다리 위에 올려놓고 어정쩡한 자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글자 치기도 전에 손가락이 시리다. 두 손을 비벼 열을 내 보았다. 손바닥을 목 주위에 감고 잠시 손을 녹였다. 다시 글자를 치기 시작하자, 눈앞에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벌이 보인다. 집게손가락만 한 말벌이다. 움직이면 쏘일까 싶어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가 사라졌다. 눈을 뜨니 맑은 햇살에 눈이 부시다. 방에 들어가 선글라스를 끼고 나왔다. 새소리가 들린다. 잠시 앉아 귀를 기울인다. 집에서 듣던 새소리와는 분명 다른 종류의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의자에 닿아 있던 복숭아뼈가 아파온다. 아, 나는 혼자 있고, 집안일은 저 멀리 있는데 나는 여전히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갈망하던 모든 것을 갖추자, 글을 쓸 수 없는 새로운 이유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중국 저장성 모간산 대나무 숲


대나무로 가득한 모간산(莫干山)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처음 왔던 건 꼭 11년 전이다. 네 살, 다섯 살이던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여행을 왔었다. 낮에는 아이들과 놀아 주느라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허름한 농가에 묵었기에 방안에 제대로 된 조명도 없었다. 새벽에 홀로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유일하게 식구들을 깨우지 않고 불을 켤 수 있는 곳이 화장실이었다.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았다. 노트북을 펴고 글을 썼다. 그때 썼던 글이 훌륭하고 아니고를 떠나, 어렵지 않게 몰입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 어떤 상황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 글쓰기를 돕는 신선한 소재를 제공하거나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글 쓰는 시간이 그저 행복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이 안 써질 때면,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거나, 바쁘다거나, 글 쓸 환경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글을 쓰지 못하는 원인이 늘 외부에 있다는 듯이. 하지만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환경이 글쓰기를 방해하는 일은 없다. 그 모든 게 핑계일 뿐. 글을 쓰지 못하는 진짜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나 자신에 있다. 글에 대항 열망이나 갈망이 약해졌든, 뮤즈를 잃어버렸든,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든… 어쨌든 원인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없는 이유를 불평하며 주저리주저리 몇 줄 써 내려가다 보니, 불편한 자세에도 조금씩 적응이 됐다. 다리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아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쓴다. 윙윙 거리던 말벌도 내가 꼼짝을 하지 않자 재미가 없어졌는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손가락도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더 이상 시리지 않다. 손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옆방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다른 가족의 소리도 배경 음악처럼 잔잔하게 들린다.



글을 쓸 수 없는 101가지 이유가 떠오를 때, 그걸 계속 묵상하지 말고 흘려보내자. 아니면 그 불평이라도 글로 옮겨 적어 보자. 일단 쓰기 시작하고, 시동이 걸리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글쓰기 모드로 들어간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쓰지 않아서. 아무리 하찮고 엉터리 글이라도 일단 쓰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오늘도 쓰는 당신이 작가입니다


닥치고 써라! 글 쓰기 좋은 날이나 장소 같은 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쓰는 내가 있을 뿐.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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