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상 1]
내가 정상에 올랐다고 말해준 건 동네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자궁경부암 검사 결과는 괜찮은데, 폐경이네요.
-저 아직 생리하는데요.
내가 큰소리로 반문하자, 의사가 더 놀란 것 같았다. 나이 50에 폐경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마치 이 나이에 임신 소식이라도 들은 듯 경악했다.
-갱년기를 영어로 클라이맥테리엄이라고 하거든요. 클라이맥스 아시죠, 절정. 지금 정상에 오르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죠?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며 몸이 붕 뜨고 어지러웠다. 누가 허락도 없이 나를 정상에 올려놨어,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휘청거리며 생각했다. 그럼 이건 정상에 올랐기에 느끼는 현기증인가.
-경구피임약 복용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폐경이라도 약 때문에 생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약을 끊고 한번 보세요.
피임약이 폐경된 몸에서 어떻게 생리혈을 쥐어짤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일단 의사의 말대로 약을 끊고 지켜보기로 했다.
피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둘째를 낳자마자 잠자리 보이콧을 했고, 덕분에 남편이 정관수술을 했다. 내 또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편들 대부분은 피임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한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고통에 원치 않은 임신일 경우 낙태의 고통까지 가중되니, 아내 쪽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루프를 끼거나 피임약을 복용했다. 나는 호르몬 조절로 폐경을 늦출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솔깃해, 피임약을 복용해 왔다. 누가 몸에 좋다고만 하면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그 말을 따라왔는데, 어쩌면 잘못된 정보를 받은 건지 모른다.
젊은 의사는 호르몬제 처방으로 웬만한 갱년기 증상은 금방 개선될 거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조기 폐경도 많다는 뉴스를 본 적 있지만, 겪어보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위로랍시고 던진 말이다.
의사의 진단 한마디는 힘이 셌다. 하루아침에 갱년기가 시작되었다. 생리를 한두 달 거른 적도 있으니, 이러다 완전히 멈춘 데도 이상하지 않다. 안면홍조 때문에 외출을 줄이고 화장이 짙어진 지도 한참 되었다. 붉게 변한 피부도 보기 싫었지만, 화끈화끈한 열감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증상이 있어도 그동안 갱년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의사가 폐경이라는 말을 꺼내자 갑자기 이 모든 일이 하나로 선명하게 연결되어 버렸다. 혹시라도 정상 근처에 와서 어물쩍 돌아내려 갈까 봐 그랬는지 의사는 내 등을 떠밀어 확실하게 정상에 올려놓았다.
넌 폐경됐어. 이제 갱년기라고.
잠을 설치는 날이 늘었다. 잠을 못 자니 밤낮으로 예민해져 식구들에게 신경질을 자주 냈다.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기분 좋은 설렘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먹구름을 동반한다. 몸에 작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여기저기가 가렵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피곤하다. 오래된 휴대전화처럼 충전을 해제하는 순간부터 무서운 속도로 방전된다. 휴대전화라면 새 걸로 교체하면 되지만, 내 몸은 버릴 수도 없다. 산부인과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정상 앞에서 슬쩍 돌아내려 가면 영원히 갱년기를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 버튼을 누른다.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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