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상 3]
(지금, 정상 1,2화를 먼저 읽으시면 좋아요)
미진을 찾아야 한다. 미진과 함께 다시 한번 관악산에 올라야 한다. 잘못 끼워진 단추를 바로잡고 싶다.
관악산에 오르기 전, 나는 파타고니아를 먼저 찾았다.
우리 옷은 입지 마세요. 덜 사고 더 요구하세요.
그 말에 혹해 미국의 3대 아웃도어 브랜드 중 하나라는 파타고니아의 한국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가격표를 둘러보니 파타고니아가 더 아득하게 느껴진다. 사지 말라고 하면 왜 더 사
고 싶은 걸까. 등산화를 하나 골라 결제 버튼을 누른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단단하고 두툼한 등
산화는 자갈밭을 달리거나 벼랑 끝에 올라가도 끄떡없을 것처럼 튼튼해 보인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미진을 기다린다. 30년 전 그날처럼, 약속 시간이 5분쯤 지나자, 미진의 얼
굴이 보인다. 거의 10년 만인데도 미진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 숱도 줄
지 않았고, 상아색 윈드스토퍼는 허리에 라인이 들어가 미진의 날씬한 몸매를 돋보이게 해준다.
미진과 나는 한참 동안 손바닥을 마주치고 얼싸안기도 하면서 소녀들처럼 수다를 늘어놓았다.
에베레스트도 올라갈 수 있겠다.
미진이 자기 배낭에 바리바리 싸 온 간식과 물을 보여주다 말고 내 어깨 위로 삐죽 솟아오른
65리터 배낭을 가리키며 키득거린다.
등산은 몸만 있으면 할 수 있다며? 이제 안 속아.
30년 전 우리는 미진의 말대로 몸만 달랑 가지고 산을 올랐다. 반소매 티에 꼭 끼는 청바지
를 입고 바람막이 같은 건 챙겨 오지도 않았다. 간식은커녕 물 한 병 없는 빈손이었다. 게다가
나는 3센티 정도 굽이 있는 옥스퍼드화를 신고 있었다. 내가 가진 신발 중 그나마 편안한 신발
이었다. 한창 멋 내고 싶을 때였다. 옷차림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산에 온 걸 후회했다. 발가락과 발꿈치 피부가 벗겨져 따가웠다. 통증 때문에 계속
절룩거렸다. 목도 말랐다. 그럼에도 안 아픈 척, 괜찮은 척 꾸역꾸역 올라갔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물건들처럼 쉬지 않고 떠밀려 가다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정상이 5백 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갈림길이 나왔고, 미진과 나는 그제야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고 생각할 틈을 주자, 우
리는 어이없게도 이만 돌아가기로 선택했다.
바로 코앞이 정상인데 그냥 내려가요?
연주대 다 왔어요. 바로 저긴데…….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우리에게 한 마디씩 던졌다. 괜찮지 않은 몸으로 괜찮다고 답하며 미련
없이 왔던 길을 돌아내려 갔다. 나 때문에 정상에 오르는 걸 포기했을까 봐 미진의 눈치를 살폈
지만, 미진도 정상에 미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 후 단 한 번도 산에 오른 적이 없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유혹해도 높은 곳에 오르지 않
는 걸 무슨 철칙처럼 지키며 살았다.
산에 올라간다면서 왜 버스를 타지?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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