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30
대충 쓰자고 시작했는데, 어느새 책 한 권이 되어버렸다.
‘100일 글쓰기 챌린지’라니, 거창한 이름을 달아놓고도 사실 처음엔 자신이 없었다. 매일 쓸 수 있을까, 쓸 거리가 있을까, 억지로 채우는 문장들이 부끄럽지 않을까. 불안이 자신감을 압도하던 날들. 그래서 제목도 이렇게 붙였다. 〈대충하지만, 매일 씁니다〉.
그 제목에는 스스로를 향한 면죄부가 있었다. 대충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편을 쌓아 보자는 다짐. 돌아보니 ‘대충’은 내가 생각했던 '대충'이 아니었다. 매일 새벽, 잠을 깨우고 책상을 마주 앉아 글을 쓰는 일은 결코 대충으로는 버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서른 편의 글이 모였다. 브런치북으로 묶어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브런치북은 30편을 넘길 수 없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TV에서 아나운서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처음 눈에 들어온 지원자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막막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화면을 뚫고 나오는지 알아보는 ‘감’이 있었다.
컨설팅 회사에서 일할 때도 비슷했다. 수많은 레주메를 훑다 보면, 손에 남는 몇 장이 있었다. 면접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분 안 돼 합격 여부가 직감으로 느껴졌다. 말하자면, 경험 끝에 체득되는 ‘감’이었다.
나는 소설에서도 그 '감'을 찾고 싶었다. 오랜 세월 소설 쓰기를 동경하면서도, 소설에 대한 '감'만큼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작법서를 샀다. 수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충고를 반복했다. 하지만 책만 읽어서는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나운서도, 컨설턴트도, 결국은 무대와 현장에서 수없이 부딪혀야 '감'을 얻을 수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배우는 지식은 방향을 비춰주는 손전등일 뿐, '감'은 직접 쓰는 행위에서만 길러진다.
많은 작법서들이 결국 한 마디로 귀결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닥치고 써라.”
김연수 작가가 <소설가의 일>에서 한 말처럼, 작가에게 중요한 건 ‘쓴다’는 동사뿐이다. 잘 쓰든 못 쓰든, 일단 쓰는 순간 그는 작가가 된다.
처음엔 그저 ‘대충 쓰기’를 허락했을 뿐인데, 글은 생각보다 성실하게 나를 데리고 갔다. 하루하루 쓴다는 행위가 내 안의 감각을 조금씩 길러 주었다. 문장을 보는 눈, 소재를 포착하는 귀, 호흡을 조율하는 리듬감이 서서히 생겨났다. 그것은 책이나 강연에서 얻을 수 없는, 오직 반복 속에서 길러지는 몸의 기억이다.
이제는 안다. 글쓰기의 감각은 쓰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감'은 천재의 재능이 아니라, 매일 쓰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선물이다.
오늘도 새벽이 밝아온다. 여전히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불안 위에 글이 쌓인다. 대충이라도, 억지로라도, 결국 쓰는 동안 '감'은 길러진다. 쓰는 손끝에서 조금씩 빛을 얻는다.
책 한 권이 완성되었다 해도, 나는 내일도 다시 쓸 것이다. 대충하지만, 매일. 그리고 그 대충들이 모여, 언젠가 또 다른 책이 될 것이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