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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르지 않은 곡, 내가 쓰지 않은 문장

100일 챌린지_Day 63

by 윤소희

남편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인 시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한국에 자주 드나들던 그가 마당에 들어서자, 숨 막히던 여름이 스르르 옅어졌다. 아직 시원하다고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더위는 어느새 식어 미지근해졌다. 몇 달간 방치된 마당은 잡초로 뒤덮였고, 태풍에 꺾인 파라솔은 기울어진 채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남편은 먼지 쌓인 그릴을 꺼내 닦고 불을 피웠다. 불꽃이 일어나자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저녁의 기운이 바뀌었다. 소리와 냄새, 불빛이 뒤섞이며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초입이 겹쳐졌다.


옆집 강아지들이 고기 냄새를 맡고 연달아 짖어댔다. 담을 넘겨 보며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던 아이들이었기에, 그 소란마저 즐거워했다. 우리는 마당에 있는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작년에는 삿포로로, 재작년에는 시칠리아로 여행을 떠났지만, 올해 연휴는 고3 수험생을 이유로 집에 머물기로 했다.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거의 전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녁이 무르익자 남편이 음악을 틀었다. 아빠의 선곡에 아이들의 야유가 농담처럼 이어졌다. 두어 번 플레이리스트를 바꾸던 남편이 ‘그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다섯 해 전, 여름 여행길에 온 가족의 음악 취향을 맞추기 위해 함께 만든 목록이었다. 각자 다섯 곡씩 고르고, 불평을 줄이기 위해 곡들을 섞어 편집했다. 처음에는 마음에 맞지 않는 노래가 더 많았다. 하지만 여행 내내 듣다 보니, 낯선 곡들이 점점 익숙해졌다. 싫다고 여겼던 멜로디가 어느새 입술에 맴돌고, 결국 ‘우리 가족의 음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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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못한 연휴였지만, 멀리 간 것보다 넓은 풍경을 본 듯했다


책을 읽는 일도 그와 닮아 있다. 좋아하는 작가, 익숙한 장르만 고르면 읽는 순간은 편하지만, 독서의 세계는 협소해진다. 낯선 장르를 억지로 읽다가 불현듯 만난 한 문장이 내 생각을 뒤흔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원치 않았던 곡이 내 귀를 넓혀 주듯, 원치 않았던 책이 내 시야를 열어 주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 내 취향, 내 언어만 좇다 보면, 글은 금세 지루해진다. 반복 재생되는 플레이리스트처럼 밋밋해진다. 하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문장 안으로 불러들이는 순간, 전혀 다른 리듬이 생겨난다.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었던 경험,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기억, 뜻밖의 대화 속에서 건져 올린 타인의 문장이 글을 살아 있게 만든다. 낯섦이야말로 창조의 토양이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마당을 감싸자, 마음에 쌓였던 답답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떠나지 못한 연휴였지만, 멀리 간 것보다 넓은 풍경을 본 듯했다. 삶은 내가 고른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곡, 내가 읽지 않으려던 책, 내가 미처 고르지 않은 문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이야기를 확장한다. 내가 받아들인 낯섦이 글도 삶도 새롭게 노래하게 한다.





Weixin Image_20250913142446_311.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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