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64
커피를 끊은 뒤로 카페에서 주문할 때마다 늘 난감하다. 메뉴판의 절반 이상이 내게서 사라진 세계. 익숙한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 같은 단어들을 빠르게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직원의 시선이 재촉처럼 느껴질수록, 낯선 이름 앞에 눈은 더 어두워진다.
여느 때처럼 망설이던 순간, 메뉴 한가운데 다른 서체로 쓰인 단어 하나가 눈을 붙잡았다. Pistachio Latte.
낯선 듯 익숙한 조합. 새롭게 추가된 메뉴인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어 더 눈에 띄었다.
“이걸로 할게요. 커피는 안 들어가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내 앞에 놓인 컵은 하나의 풍경 같았다. 투명한 컵에 담긴 우윳빛 액체, 그 위를 살짝 덮고 있는 피스타치오 그린. 그 대비가 은근히 우아했다. 나는 호기심을 안고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당혹감. 입안에 퍼진 것은 다름 아닌 차가운 우유였다.
나는 컵을 들어 다시 살폈다. 그린은 표면에만 살짝 얹혀 있을 뿐, 음료의 본질은 우유였다. 곱씹다 보니 웃음이 났다. 아무도 나를 속이지 않았는데, 혼자 속은 듯한 기분. ‘라테(Latte)’는 이탈리아어로 ‘우유’를 뜻한다.
하지만 한국이나 영어권 카페에서 라테는 거의 언제나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섞은 카페 라테다. 언어의 이동이 만들어낸 의미의 변형. 그 결과 나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있음에도, ‘라테’에서 순순히 우유를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내가 이미 “커피가 들어가지 않죠?”라고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내 의식은 분명히 알았다. 피스타치오 라테는 논커피 음료라는 것을.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언어와 문화가 심어놓은 습관적 상상, 그 허상이 현실의 맛을 덮어버린 것이다. 아무도 나를 속이지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의 기대에 속았다.
나는 피스타치오 라테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정직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독자의 기대를 교란하는 글. 속이지 않으면서도 예상을 뒤엎는 글. 우유와 피스타치오가 섞여 고운 빛을 내듯, 단순한 재료가 만나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글.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놀라움과 웃음이 함께 터져 나오는 글을.
기대의 어긋남 사이에서 빛나는 순간, 거기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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