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66
15년 전 일기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전혀 아기자기하지 않고 오히려 가계부처럼 단정한 스프링 노트는 조용히 책장 속에 숨어 있었다. 내 젊은 날의 흔적을 찾으려 책장을 열었지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아이들의 서사였다. 두 아이가 첫 돌과 두 돌을 맞던 시절, 나는 매일의 작은 순간을 기록했다. 잊고 있던 과거 속에서, 나는 그들의 몸짓과 표정을, 그리고 그 시절의 나 자신까지 다시 만났다.
막내의 기록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돌이 되자마자 어린이집에 보냈던 날, 시간 단위로 적힌 글은 놀랍도록 세밀했다. 엄마와 떨어져도 울지 않고, 잘 놀고, 잘 먹고, 낮잠까지 스스로 잘 잤다는 기록. 처음 걸음마를 떼던 날, 세 발자국을 간신히 옮기고 넘어졌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는 커다란 공을 손에 쥐고 다시 나선 아이. 그 욕심과 자신감이 귀엽고도 놀라워,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뭐가 되든 되겠다.” 두 아이를 동시에 키우던 전쟁 같은 날들 속에서, 막내의 아기 시절 기억은 사실 희미했다. 그래서 기록은 더욱 소중했다. 나는 일기 일부를 캡처해 막내아이에게 보냈다.
“거봐, 엄마 말이 맞지. 넌 아기 때부터 자기 색깔이 분명했고, 마음먹은 건 꼭 해냈어.”
지금 학교에서 평범해 보이는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기록이 든든한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큰아이의 기록은 또 달랐다. 지금은 무모한 도전을 일삼고, 얼마 전에도 어깨가 탈골되어 팔걸이 보호대를 한 아이지만, 오래된 일기장 속 아이는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주변을 살피며 작은 발걸음을 옮기던 아이. 나는 뜻밖의 빛을 마주한 듯, 아이의 숨은 기질을 다시금 발견했다.
“너는 원래부터 조심성 없는 아이가 아니었어. 네 안에는 여전히 신중함이 살아 있어. 필요할 때 다시 꺼내 쓰면 돼."
기록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 잃어버린 성향을 되살리는 힘을 가진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겪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문제는 당사자가 그 변화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연스러움에 묻혀 변화는 인식 밖으로 밀려난다. 기록은 그럴 때마다 거울이 된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 “비포와 애프터”를 보여주는 타임캡슐. 기록은 좋은 성향을 회복하게 하고, 새로운 자기 서사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왜 그 시절 나는 그렇게 부지런히 일기를 썼을까. 다른 글은 써도 일기는 잘 쓰지 않았기에 궁금했다. 노트 맨 앞에 적힌 '어제 일기 (Postgame Analysis)'를 보면, 단순한 감정 기록이 아닌, 스포츠 경기를 복기하듯 객관적 분석을 시도한 글임을 알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기록은 지금의 나와 아이들에게 소중한 증거로 남았다. 아이들은 아기 시절 기억을 잊었고, 부모조차 바쁘다는 이유로 자녀의 본래 성향을 잊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살아온 시간의 결, 변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존재를 증명한다. 15년 전 일기는 오늘, 나와 아이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되살리는 힘이 되었다. 오늘 남기는 100일 챌린지의 문장들 역시 언젠가 미래의 나에게 또 하나의 서사가 될 것이다. 기록은, 우리 각자의 서사를 세우는 가장 단단한 토대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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