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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n 14. 2020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이 싫다!

거칠지만 다채로운 삶을 꿈꾸며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고, 물을 찰지게 머금어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쌀밥. 예전 같으면 양반이나 상류계급만 먹을 수 있었다는 쌀밥은 반찬 없이 먹어도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좋은 쌀로 갓 지은 고슬고슬한 쌀밥의 그 윤택한 맛이 나는 싫다. 


굳이 밥을 먹을 거라면 쌀밥보다는 보리, 콩, 수수, 팥, 조, 귀리, 율무, 현미, 흑미 등을 섞은 잡곡밥을 먹는다. 건강과 영양 면에서 좋다거나,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야말로 퍽퍽하고 거친 잡곡밥의 그 야성적 질감을 좋아한다.  



쌀밥은 사람으로 치면 태어나서 평생 고생 한번 안 해보고, 세상 물정이나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금수저다. 그런 인물이 매력 없는 건 지나친 안전과 과잉이 불러오는 권태와 무료함 때문일 것이다.  


하마터면 쌀밥으로 살 뻔했다. 비교적 풍족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좌절 없이 그럴듯한 대학 졸업장과 직장을 얻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일찌감치 내던지고 미지의 세계로 무작정 뛰어들었기에, 화목한 줄 알았던 가정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기에, 낯선 땅에서 가난한 이방인으로 아등바등 살아남았기에, 인생이 내게 다채로운 고난을 종종 던져 주었기에 윤기 좌르르 흐르는 쌀밥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핍은 고통이 따르지만, 최소한 무료함과 권태,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칠고 딱딱하고 퍽퍽한 음식들이 쌀밥보다 소화하기는 힘들지라도, 매 끼니마다 다채로운 맛과 질감을 느끼며 내가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끼고 싶다.  


오늘도 나는 고슬고슬 지어진 하얀 쌀밥 대신 입안에서 까끌까끌 맴돌며 잘 씹히지 않는 보리밥을, 퍽퍽해서 쉽게 목이 막히는 조밥을, 터벅터벅한 미숫가루 한 줌을, 푸실푸실 부스러지는 찐 감자를, 저렴하게 끼니를 때우기 좋은 밀가루 수제비를, 눅진한 조청을 듬뿍 찍은 구수한 현미 떡을, 이 사이에 잔해를 남기는 쫀득쫀득한 찐 옥수수를, 돼지고기 냄새를 가리기 위해 부추를 듬뿍 넣은 만두를 식탁에 올린다.  


내 삶이라는 식탁에 보드라운 쌀밥 대신 올라오는 흥미진진한 맛과 질감의 다양한 먹을거리들에 감사하며, 내게 주어진 거친 음식들을 천천히 꼭꼭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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