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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18. 2020

차 안에 갇혀 꼼짝 못 하는 그 시간이 좋다?

세상을 마음에 들일 준비를 하는 시간

차 안에 갇혀 꼼짝 못 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교통체증에 걸린 차 안에서 짜증을 내기는커녕 지루할 틈이 없다. 시선을 살짝만 돌려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아니 자주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차창 유리 너머로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잊고, 차의 프레임이 확보해 준 자신의 공간이 견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운전대에 앉아 조그만 앞 거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는 여자, 길게 기른 새끼손가락 손톱으로 열심히 코를 후비는 남자, 평소라면 절대 사람들 앞에서 피우지 않을 담배를 물고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이는 여자, 옆에 앉은 여자의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를 열심히 조몰락거리는 남자, 앞에 앉은 택시 기사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뒷자리에서 부둥켜안고 열렬히 키스하는 남녀. 그들과 따로 또 같이 슬며시 섞여 있을 수 있는 그 작은 공간을 나는 좋아한다. 



세상이 궁금해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녔다. 코르시카 섬의 뜨거운 모래사장 위에서도, 별이 쏟아지는 모간산(莫干山) 자락에서도, 쿤밍에서 시쐉반나(西双版纳)로 가는 버스 안에서 24시간 내내 꼼짝달싹 못하고 창밖만 바라볼 때도, 왕복 2차선을 3차선처럼 양쪽에서 수시로 추월해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던 그리스의 하이웨이에서도,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인천 항에서 천진 항으로 향하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날씨 좋은 날 쿠바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미국 최 남단 키웨스트로 향하는 미 동부 관통 도로 US1을 달리는 차 안에서도…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세상 어느 곳을 다녀도 내 시선은 바깥보다는 내 안에 머물곤 했다. 아마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섞여 있으나, 나 홀로 고독할 수 있는 작지만 견고한 공간인 차 안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세상을 슬쩍 기웃거리면서도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내 안에 고요히 머물 수 있기에. 


하지만 차 안에 있을 때의 시간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차문을 열고 내려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다. 교통체증으로 영원히 도착할 것 같지 않은 목적지에도 언젠가는 도착하게 마련이니까. 나를 지켜줄 작은 프레임 안에서 나와 두려워하던 세상에 섞여 들어가야 할 순간이 반드시 온다. 어쩌면 그래서 차 안에 갇혀 꼼짝 못 하는 그 시간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차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맞기 전 차창을 기웃거리며 조금씩 세상을 마음에 들일 준비를 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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