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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23. 2020

뿌연 나날을 보낼 때도 '밝은 햇빛'

내 이름을 찾아서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녔다. 노랑, 빨강, 그리고 흰색. 해마다 정해진 색깔이 있어서, 색으로 자연스럽게 학년을 알 수 있게 했던 명찰. 그때 명찰에는 한글이 아닌 한자로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교련 시간에 명찰에 적힌 그 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교련. 그 시절에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과목 자체가 군대식 교육을 시키는 과목이다 보니 교련 선생님은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다. 그런 교련 선생님이 내 가슴에 달린 명찰을 뚫어져라 한참을 바라보니 내 가슴은 이미 빠른 속도로 뛸 수밖에 없었다.


“어허, 이 녀석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일세.” 


순간 바싹 긴장해 얼어 있던 나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숨소리마저 죽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난 뭘 잘못한 걸까?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면 당장 죽여도 그만일 텐데, 내게 어떤 벌이 내려질까? 


내 명찰을 들여다보던 교련 선생님의 반공 교육이 시작되었다. 교련 수업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반공 교육이었던 것. 김일성 이름의 ‘일’ 자가 본래는 ‘一 (한 일)’자였으나,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태양을 뜻하는 ‘日(날 일)’로 바꿨다는 이야기였다. 교련 선생님의 눈이 다시 내 가슴 위 명찰로 돌아온다. 

이 녀석 이름에 日(날 일)자가 두 개나 있잖아. 그러니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이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눈치를 보며 한참을 긴장한 채 앉아 있던 나는 선생님의 얼굴 표정이 비교적 부드러운 것을 발견하고, 나름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휴우, 이번 시간도 겨우 이렇게 넘기는구나. 


교련 선생님이 김일성보다 나쁘다고 욕한 내 이름,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첫 딸에게 지어주신 이름은 소희. 


昭曦 

밝을 소, 햇빛 희. 

뜻으로 보자면 ‘밝은 햇빛’이다. 

여자 아이 이름에 보통 ‘姬(계집 희)’를 많이 쓰는데, 엄마, 아빠는 딸에게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햇빛만으로도 밝은데, 그 앞에 밝음이라는 글자를 더해 '밝은 햇빛'이라니.


평생 ‘햇빛 희’ 자를 이름에 쓰는 사람을 딱 한 번 만났다. 중국에 어학연수 왔을 때, 연휴를 이용해 중국 내 여행을 다닐 때였다. 일행으로 만난 중국인 아저씨 이름이 王照曦(왕짜오시). 중국어로 읽으면 성조는 달라도 두 이름 모두 ‘짜오시’로 발음된다. 아저씨는 자기도 ‘햇빛 희’ 자를 이름에 쓴 사람은 처음 봤다며 반가워했다.


밝은 햇빛. 


한동안은 미세먼지 농도 높은 베이징 하늘처럼 햇빛이 보이지 않는 뿌연 나날을 살 때도 있었다. 내 이름이 내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름을 버린 적도 있다. 하지만, 미세먼지가 아무리 뿌옇게 끼어 있어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햇빛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엄마, 아빠의 소망과 사랑으로 꾹꾹 눌러 담은 ‘밝은 햇빛’은 뿌연 나날들 중에도 내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으리라 믿는다.


내 삶의 미세먼지 농도와 관계없이 나는 '밝은 햇빛'이다. 앞으로도 남은 날을 '밝은 햇빛'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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