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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Dec 18. 2020

금지, 금…지…금…지금…지금

창문을 활짝 열 때

"엄마, 책 읽어 줘." 

"어, 잠깐만. 엄마, 이것 좀 하고." 


엄마는 여느 때처럼 식탁 의자에 앉아 조그만 컴퓨터를 켜 놓고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바쁘게 '따다닥 따다닥' 소리를 낸다. 어쩌다 '따다닥' 소리가 멈추면 엄마가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저 안에 어떤 재미있는 게 들어 있는 걸까? 엄마 옆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컴퓨터 화면을 살짝 들여다본 적이 있다. 재밌는 만화도, 게임도 없는 컴퓨터 화면에는 조그맣고 까만 벌레들이 가득 차 있는 듯 어지럽기만 했다. 도대체 엄마는 저런 걸  무슨 재미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까? 고개를 살짝 돌려 엄마의 얼굴을 살핀다. 엄마 눈썹 사이에 작은 두 개의 주름이 생기고, 절대 손 빨면 안 된다고 나를 야단치던 엄마가 자기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고 있다. 흠… 역시 재밌는 걸 보고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해. 엄마의 컴퓨터에 곧 흥미를 잃고, 형님한테로 간다.  


책을 좋아하는 건 형님도 엄마 못지않지만, 그래도 형님 편이 수월하다.  

"형님~ 우리 같이 비행기 만들래?"  

내가 한 마디만 하면 형님은 바로 나를 따라오는 편이니까. 하지만, 형님도 얼마 전부터 자기는 초등학생이라며, 숙제하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나한테 소리칠 때가 있다. 소리를 지를 때 보면, 집에 엄마가 두 명이 되었나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래도 그건 잠시뿐, 형님은 내가 하자는 건 뭐든지 그대로 따라 준다. 아무리 읽어 달라고 졸라도 엄마는 잘 안 읽어 주는 책도 형님은 내가 “이거 읽어 줘." 하면 척척 읽어 준다. 물론 중간중간 가르치려고 할 때가 있어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형님이 있어 귀찮은 한글 공부 안 해도 되니 불만은 없다. 형님이 어딜 가버린다면 사는 게 너무 불편할 것 같다.  


"엄마, 나 오늘 밥도 많이 먹었으니까, 놀이터 가서 놀면 안 돼?" 

"어, 잠깐만… 엄마, 이것 좀 다 읽고." 


형님이 읽어주는 책을 보는 것도, 레고로 비행기를 만드는 것도, 그림 그린 종이를 모아 책을 만드는 것도 다 재미 없어지자,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미끄럼도 타고 싶고, 모래놀이도 하고 싶고, 막 뛰어다니고도 싶다.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해주는 형님도 현관문 밖으로 나가는 건 해줄 수 없다. 나는 용도, 공룡도 무서워하지 않지만,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고 나가는 일은 어쩐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엄마가 밖에 혼자 다니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나쁜 아저씨들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말한 적 있어서다.  


엄마 손에 들려 있는 책 두께를 보아하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쪼르르 형님한테 간다. 너무 심심해서 펭귄 인형 겨드랑이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 보았다. 폭신한 것이 잡힌다. 손가락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구멍을 자꾸 키워 가다 보니, 인형 속에 들어 있는 하얀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다. 

"형님~ 이것 좀 봐 봐. 내가 솜사탕을 만들었어." 

"와~ 정말 솜사탕이다." 

펭귄 인형의 구멍은 점점 커지고, 형님과 내 손엔 점점 더 큰 솜사탕이 만들어진다. 


"엄마, 이것 좀 봐 봐. 형님이랑 내가 솜사탕을 만들었어." 

"뭐? 그 솜은 또 어디서 꺼냈어?" 


꽥! 하는 소리에 귀가 아프다. 솜사탕을 만들어내 기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엄마를 찾았는데, 곧바로 후회했다. 역시 엄마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형님과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죽인다. 형님이 먼저 내 귓가에 속삭인다. 

"지금 저렇게 소리 지르는 건 재규어야. 재규어가 우리 엄마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우리 엄마는 멀리 여행 갔고." 

"그 무서운 재규어?" 

"응, 우리 엄마가 돌아오면 저 재규어를 무찌를 수 있어." 

형님과 나는 키득거리다 웃음소리마저 죽였다. 재규어가 또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얘들아, 엄마 30분만 잘게. 엄마 깨우지 말고 둘이 잘 놀고 있어." 


엄마가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잔다. 엄마는 늘 책을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따다닥 따다닥' 소리를 시끄럽게 내거나, 갑자기 침대에 쓰러져 잠을 잔다. 엄마는 형님이나 나랑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 엄마는 늘 바쁘다. 그리고 소리를 잘 지른다. 정말 형님 말대로 우리 엄마는 멀리 여행 가고, 재규어가 엄마 옷을 입고 엄마 흉내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이런 생각을 하니,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 어디 있는 거야? 형님이랑 나 안 보고 싶어? 


재규어가 벌써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형님과 나는 살금살금 엄마 방으로 가 침대 위에 올라갔다. 누워 있는 재규어를 손가락으로 몇 번 건드려 본다. 아무런 반응도, 아무런 소리도 없다. 잠이 든 것이다.  


그때 엄마 방 한쪽 벽면에 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창문 사이로 우리가 떨어질까 겁이 난 엄마는 창문은 절대 만지면 안 된다고 여러 번 큰 소리로 당부했다. 창문 가까이라도 갈라치면, 재규어가 '꽥!'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재규어가 내지른 소리 중에 기억나는  말 하나가 머릿속을 맴돈다. 


"금……지." 

"형님! 금지, 금…지…금…지금…지금…지금…지금…" 


형님과 나는 깔깔 웃었다. '금지'가 금세 '지금'이 되어 버리는 게 너무 재밌어 웃음이 계속 났다.  


"형님, 엄마 자니까, '지금' 창문 한 번 열어 볼까?" 

"창문? 지금?" 

형님도 재규어가 깰까 무서운지 목소리가 개미 소리 만해졌다. 


이런 일은 역시 형님보다는 용감한 내가 먼저 나서야 한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창문 옆으로 갔다. 창문이 좀 높아 쉽게 열리지 않는다. 난 우리 방 침대로 달려가 베개를 들고 왔다. 베개를 밝고 올라가니 손잡이에 손이 닿는다. 창문을 열어젖힌다.  



아, 시원해. 


바깥에서 찬 바람이 훅 끼쳐 들어온다. 바람이 내 얼굴에 마구 뽀뽀를 한다. 조금 간질간질하다. 시원한 바람을 좀 더 맞아 보려고 열린 창의 좁은 틈으로 머리를 자꾸 더 내밀어 본다. "나두, 나두!" 재촉하는 형님에게 잠시 자리를 양보하고, 난 방으로 뛰어가 장난감 블록과 작은 인형들을 들고 왔다. 좁은 창틈으로 블록을 던지고, 인형들을 던진다. 작은 곰돌이 인형이 하늘을 날아 호숫가 옆 길에 내려앉았다.  


아, 나도 저렇게 훨훨 날고 싶다. 밖으로 나가서 놀고 싶다. 빨리 엄마가 돌아와 저 재규어를 물리치고, 바깥에서 형님이랑 셋이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 창문을 있는 힘껏 밀어 열고, 그 좁은 틈새로 머리를 최대한 내밀며 바람을 마셔 본다. 


"엄-마---! 지금, 지금, 지금, 지…금…지…금지, 금지." 


앗, 엄마, 아니 재규어가 일어나는 기척이 들린다. 형님! 얼른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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