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자백만으로 살인죄가 적용되나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사실 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라 털어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수십 번, 수백 번 고민이 되었다. 나에게는 비밀이 꽤 많지만, 이것에 대한 것만큼은 남편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정말 글로 써버리고 난 후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는가. 아… 아무래도 걱정스러워 다시금 고민에 빠진다.
나는 사,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이 문장 한 줄을 도대체 몇 번을 지웠다 다시 썼는지… 여전히 이 글을 공유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양손이 땀으로 축축해진다. 하지만 후회와 걱정, 불안과 공포 속에도 막상 이 문장을 써 버리고 나자 마음 한편이 후련해진 느낌을 부인할 수 없다.
“누구도 비밀을 가질 수 없지.”
프로이트 박사가 대답했다.
“입술이 침묵한다면 손가락 끝으로 수다를 떨게 마련이야."
제드 러벤펠드 <살인의 해석> 중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대숲에서 외쳤던 그 누군가의 이야기가 결코 특별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비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으니까. 비밀을 간직하기 위해 혼자 발버둥 치며 고뇌했던 힘겨웠던 시간들… 어쩌면 입은 다물었을 지라도 나는 '살인자'라는 인상이나 분위기를 슬쩍슬쩍 눈치채지 못하게 풍기며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이제 속 시원히 말한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살인을 했다는 말이다.
내가 죽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을지,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묻지 말라. 나는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살인은 시라기보다는 산문에 가깝다.
…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중
살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코! 절대로!
조금이라도 그 어려움과 곤란을 덜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인간성을 부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 전에 눈을 마주치는 일은 절대 금물이다. 마음이 금세 약해진다. 피해자의 이름을 묻는다든지, 그의 욕망이나 추억을 들여다보는 일 역시 금물이다. 소수의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피해자가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망설이게 되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타고난 거부감이 작동하며 살인에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피해자와는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문화적, 도덕적, 사회적으로도 무조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내가 죽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 2015년 7월 24일에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이 담긴 형사소송법 개정안 (태완이 법)이 통과되었다.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 해도 살인으로 인해 언제든 기소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이 고백은 더욱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체도, 살인 흉기도,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심지어 피해자를 위해 신고해줄 사람도 있지 않은 그 살인에 대해 오직 가해자의 자백만으로 살인죄가 적용될까? 당시 사건을 재현해 보라고 하면, 아무것도 재현해 낼 수 없는데, 피해자의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는데, 내가 죽였다는 자백만으로 나는 살인죄를 적용받고 감옥에 가게 될까? 나의 짧은 법률 지식으로는 도무지 어떤 법적 결론이 날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어쨌거나 살인죄를 적용받아 수감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이 비밀을 글로 쓰는 이유는...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자, 주사위는 던져졌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모르는 것에 대해 나는 당신들에게 털어놓았다. 이제 전화기를 들고 경찰서에 신고를 하든, 하지 않든 다음 행동은 당신 몫이다. 바로 당신!
(이 글은 '낙태'를 염두에 두고, 여러 관점 중 한 가지만 포착해서 쓴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