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Jan 14. 2021

안경을 잃어버렸을 때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는 게 있다!

"어랏, 이상하다! 분명 여기 있어야 하는데…"


운전대 앞에 앉아 앞을 한참 더듬는데, 늘 있던 안경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주말 내내 운전대를 남편에게 맡기긴 했지만, 남편이 내 안경에 손을 댔을 리는 없을 텐데. 참을성이 없는 나로서는 물건 찾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다. 심지어 당연히 있어야 할 물건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 그것도 당장 그것이 필요할 때는 더욱더.  


"쉿(Shit)!!" 

결국 참을성의 한계에 도달해, 차 안에서 소리를 꽥 지르는 걸로 ‘포기’를 깨끗이 선언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썼으니, 안경에 의존한 게 벌써 20년이다. 안경이 콧대를 눌러서인지 안경을 쓰면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왔다. 평소의 두통과는 조금 다른데, 뭐랄까, 사람을 몹시 조바심 나고 짜증 나게 한다. 콘택트 렌즈를 대신 껴 보았지만, 안구가 자주 충혈되고 늘 건조했다. 5년 전 큰 맘먹고 라식 수술을 했지만, 재수가 없던 탓인지 수술 후에도 시력은 0.5를 넘지 못했다. 의사는 재수술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권했으나, 차마 내 눈을 다시 그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지난 5년 간, 내가 선택한 건 약간 뿌연 세계에 몸을 던지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지나치는 사람의 얼굴을 잘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모호하고 뿌옇기는 했지만, 본래 세상에 관심이 없던 나는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5분 거리인데, 뭘…’  

액셀을 밟자 차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친숙한 거리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의 표정이나 손동작을 읽을 수는 없지만, 커다란 덩어리로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은 볼 수 있으니, 방어 운전을 하는데 굳이 안경이 없어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딸아이가 피아노를 시작한 건 겨우 한 달 전. 정보통들과 대화를 나누던 자리에서 집에서 5분 거리에 피아니스트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50대 중반의 점잖고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나, 지금은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강의 나가는 걸 관뒀다고 들었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 같은 어수선함 같은 건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이 잘 정돈된 집이다. 금방이라도 앞치마를 두른 안주인이 튀어나와 예쁜 찻잔에 따뜻한 차를 내어놓을 것 같은. 몇 년 전 상처했다는 소문도, 상처가 아니라 이혼이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선생님에게 대놓고 그런 사적인 질문을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사 도우미가 현관문을 열어 준다. 스물이 갓 되었을까 싶은데 얼굴에 스산함과 어둠이 묻어있다. 오늘도 고개만 까닥할 뿐 인사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지난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가사도우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셈이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잔소리하는 것도 뭣하다 싶어 기분 나쁜 걸 참고 애써 무시하고 있다. 


레슨이 끝나려면 10분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피아노 소리가 뚝 끊겼다. 딸아이가 어떻게 수업받는지 궁금한 마음에 살금살금 레슨 받는 방으로 다가갔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딸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피아노 옆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이 보이고 그 건너편에 딸아이가 앉아 있다. 딸아이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고 희미하다. 가만, 선생님이 딸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은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것은 악보들인가? 눈을 한번 힘껏 감았다 크게 떠보지만, 안경이 없는 나로서는 모든 것이 뿌옇기만 하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진다. 나도 모르게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저, 레슨 아직 안 끝났는데요. 나가서 기다려 주시죠.” 


선생님의 목소리는 몹시 차갑고 무거웠다. 순간 딸아이의 눈빛이 내 눈에 와서 박혔다. 분명 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표정인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아… 네… 죄송합니다.” 


나보다 20년은 더 살았을, 더구나 딸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의 권위 앞에 얼른 꼬리를 내리고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문 밖에 서서 기다리는 10분이 몹시도 길게 느껴졌다. 손에서는 자꾸 원인 모를 땀이 흘렀다.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렸다. 


“도윤이가 악보 보는 게 서툴러서 마지막 10분은 악보 그리는 연습을 시키고 있습니다.” 

“아, 네… 우리 도윤이,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 하긴 하나요?” 

선생님이 도윤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도윤이가 갑자기 머리를 푹 숙인다.  

“도윤이요. 말 아주 잘 듣죠. 선생님이 시키는 건 뭐든지 열심히 하고.” 


도마뱀의 혀처럼 차갑고 끈적하게 감기는 목소리에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다. 고맙다고 인사를 꾸벅하고는 도윤이의 손을 잡고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늘 재잘대며 수다를 떨던 도윤이가 오늘따라 말이 없다. 차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댔다, 다리가 아프댔다 하며 걸을 수 없다고 주저앉는다. 야단도 치고 달래도 보았으나 꿈적 않고 일어날 생각을 않는 도윤이를 별 수 없이 안고 차까지 걸었다. 다리가 휘청했다. 내 품 안에 있는 도윤이의 몸이 몹시 뜨겁다. 바르르 떨고 있다. 내 기분 탓일까? 


차 안에 앉아 버릇처럼 운전대 앞을 더듬는다. 없다. 역시 안경은 그 자리에 없다. 갑자기 욕지기가 났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도윤아… 피아노… 그만 칠래?” 


가만히 창밖만 멍하니 내다보고 있던 도윤이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나를 본다. 


“엄마, 미워!” 


꽥 소리를 지르던 도윤이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한다.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도윤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악다구니가 치솟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운전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안경 없이 뿌연 시야가 갑자기 더 흐려진다. 이 더러운 세상, 뭐 볼 게 있냐, 난 보고 싶은 게 없다, 하며 안경 끼길 거부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걸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괜히 애꿎은 운전대만 세게 내리치며 소리를 꽥 지른다.  


“도대체 안경은 어디 간 거야?” 

이전 10화 금지, 금…지…금…지금…지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