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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10. 2021

결혼기념일, 며칠 내 잠겨 있던 방문이 열리고

금혼식 깜짝 선물

Happy Anniversary! 

여보,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기억나지? 후배들이 ‘이렇게 좋은 날에~’ 하는 가사로 축가를 준비했는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울상이 되었었지. 야외에서 하려던 피로연도 못하고. 그날 당신,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는데… 아마 당신의 아름다움에 햇빛이 가리고, 당신 때문에 눈이 부셔 하늘이 그토록 울었나 봐. 

지금도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 


10년 전 결혼기념일 때 당신이 우리의 소중한 날을 잊어버려서 속상했었어. 날짜를 잊어버린 건 당신인데, 오히려 나한테 짜증을 내서 몹시 당황했고. 언제나 잊어버리는 쪽은 나였는데, 결혼기념일을 잊은 당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어. 디테일을 살려 똑 부러지게 얘기하던 당신이 이거, 저거, 거시기 등 애매모호한 단어들로 이야기하는 것도 내게는 충격이었지. 


5년 전 오늘, 당신이 준비한 깜짝쇼 때문에 혼비백산했던 게 기억 나. 

더운 여름 내가 오래전에 사 준 털코트를 입고 거리를 걷던 당신. 당신의 그 꼿꼿한 자세와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에 사람들이 혹시 촬영 중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카메라를 찾기도 했지. 옆집 김 교수가 당신을 봤다고 내게 전화해 줘서 헐레벌떡 달려갔어. 골목길을 모델처럼 걷고 있던 당신. 그때도 당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분명 결혼기념일 깜짝 선물이었겠지? 


여보, 

오늘 결혼기념일은 더욱 특별해. 세상 사람들은 이 날을 금혼식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며칠 잠겨 있던 당신 방을 열자, 당신은 금혼식의 풍습대로 내게 금을 선물했지. 손으로 잘 뭉친 황금 덩어리를 말이야.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당신이 금혼식을 기억해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여보, 

당신이 내게 “누구세요?”하고 물으며 나를 피하려 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아. 

아무리 그게 당신의 연기라고 생각해도, 그 버려지는 느낌, 홀로 되는 느낌은 너무 끔찍해. 

모든 걸 잊어도 좋으니, 나만은 다시 기억해 주면 안 될까? 50주년 결혼기념일 깜짝 선물로 말이야. 


당신 방문을 밖에서 잠가 놓은 건 정말 미안해. 당신이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어.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내가 꼭 지켜봐 주기로 했던 약속 기억하지?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눈을 깜박이는 순간만큼은 내가 곁에 꼭 있어 줄 거야. 그 약속만은 꼭 지키려고. 내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그냥 사라지지만은 말아줘. 


여보, 치매가 당신의 아름다움을 갉아먹으려 발악을 하지만, 그럼에도 내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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