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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08. 2021

그녀가 돌아왔다

여신이 인간이 되어 돌아오자, 나는 개나 소가 되었다

그녀가 돌아왔다. 


어느 날 바람처럼 훌쩍 사라졌던, 그녀가 역시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가 사라진 지 꼬박 5년 하고도 1개월이 거의 다 되어가는 어느 봄날 오후였다. 5년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내 휴대폰 진동이 울리더니, 낯선 번호와 함께 그녀의 이름이 떴다. 그 이름이 눈에 들어와 박히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감독님, 안나예요. 저 돌아왔어요. 내일 저녁 시간 되세요?" 


패스워드를 이중으로 걸어 꼭꼭 잠가 놓은 아카이브. 한참 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아카이브의 빗장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녀와 촬영을 나갈 때,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매 순간 틈틈이 담아 놓았던 그녀의 모습들. 사진 한 장 한 장을 열 때마다 빛이 난다. 꽃잎처럼 얇고 보드란 입술을 살짝 벌리고 웃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 하얀 이빨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 웃을 때 눈웃음치듯 눈가에 살짝 잡히는 주름. 반듯하고 단정한 콧날 옆에 눈에 안 띄게 자리 잡은 자그마한 흉터. 눈높이에서 시작되어 아주 살짝 앞으로 숙여져 ,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 것 같은 귓바퀴와 코 아래 높이에 언제나 다르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귀고리가 꽂혀 있는 도톰한 귓불. 아,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찔한 사진도 한 장 있다. 그녀를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며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 한 장에는 넓게 파인 하얀 티셔츠 너머 그녀의 앙가슴이 살짝 보인다. 그 사진 한 장을 몰래 들여다보며 홀로 가슴 태우며 보냈던 밤들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떠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그 사진들. 2년 전 멀리서 그녀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빗장을 걸어 잠그고 아카이브의 모든 문과 창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의 '결혼'이란…… 내 삶을 바꿔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미 40대 중반에 들어섰고 두 사춘기 아들의 아빠인 내 삶이 그녀의 '결혼' 전과 후,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를 통해 직접 청첩장조차 받지 못했던 나는 그녀의 '결혼' 소식이 아팠다. 수군대는 소문으로 볼 때, 모두들 탐탁지 않게 여기는 상대와 급작스럽게 하는 결혼인 모양이었다. 결혼식장에는 당연히 가지 않았고, 그 뒤로 그녀의 사진들이 담겨 있는 아카이브의 불도 정말 꺼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유부남으로서 언감생심 꿈에라도 넘볼 수 없던 그녀는 나의 여신이었고, 상상 속의 연인이었다. 그녀가 담긴 사진들은 다른 모델보다 배 이상의 시간과 공을 들여 보정을 했고, 그녀가 가장 빛날 수 있는 앵글을 틈만 나면 연구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뒤에서, 그녀에게 많은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썼다. 탑 모델로서 탄탄대로를 걸어가도록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기 직전,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내게는 떠난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한국을 영영 떴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나의 여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내 이데아의 세계가 영원히 이데아로 멈추게 된 순간이었다. 가끔 카메라 앵글로 그녀의 모습을 담을 때마다 나의 이데아가 현실을 넘나들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는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다시는 옆에서 몰래라도 훔쳐볼 수 없도록.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갔다. 불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들고나간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그녀를 기다렸다. 시간은 더디 갔다. 지난 5년간 그녀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더 이상 모델이 아닌 그녀의 모습을, 무슨 핑계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그녀가 들어온다. 더 이상 20대가 아닌, 30대 초입의 그녀는 여전히 빛이 난다. 20대의 풋내는 사라졌지만 눈매가 더 깊어졌고, 5년 새 좀 더 마른 어깨가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성숙미가 더해져 여전히 고혹적이다. 조금 지친듯한 표정이 내 가슴을 시리게 했지만, 그녀가 나를 보고 활짝 웃어줄 때는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그냥 듣고 있기가 너무도 괴로웠다. 나도 모르게 나이프를 쥐고 있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 내 접시에 놓인 커다란 스테이크 한 조각을 다진 고기처럼 잘게 찢어 놓았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남편이란 작자를 - 아니 이제 전남편인 그 새x를 - 이미 다져진 스테이크 조각처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다. 


나의 이데아 중심에 서있던 나의 여신, 안나가 돌아왔다. 

삶에 지친 표정으로, 시린 어깨로, 그리고 이혼녀란 딱지를 붙이고… 


팀 전체가 회식하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그녀와 단 둘이 술을 마셔본 적이 없던 나다. 손끝이라도 닿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던 그때도, 어떻게든 경계를 허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르고 버텼다. 그렇게 내 나름의 방법으로 지켜주고 보호했던 그녀와 이제 단 둘이 술을 마신다.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빈 속에 마셨기 때문인지, 도저히 씹을 수 없는 아픈 안주인 그녀의 지난 삶 이야기 때문인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올랐다.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심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눈길 한 번 대놓고 주지 못하고, 홀로 설레고 아파하며 그렇게 지켜왔던 나의 여신을 어떤 개새 x가 유린했다는데… 두 눈알이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뿜어댈 듯 팽팽하게 팽창할 대로 팽창했는데도, 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분명 소리 지르며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나는 금방이라도 슬픔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돌아왔다. 

얼굴도 모르는 그 새 x 때문에 나의 여신이 신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평범한 여인이 되어, 그것도 이혼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난 정신이 아직 말짱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 고개가 앞으로 쏟아진다. 있는 힘껏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꿈에서조차 함부로 손을 델 수 없던 여신이 이제 인간이 되어 돌아왔으니, 이제는 내가 따뜻하게 안아줘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늘을 향해 대들고 싶었다. 오랜 시간 고통스러웠을 저 가녀린 어깨를 내가 안고 위로해 주면 안 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감싸 보듬어 주고, 그녀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해 쉬게 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왼손을 뻗어 그녀의 가냘픈 손 위로 가져갔다.  


내 손바닥 밑에서 잠시 부르르 하던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경멸의 눈빛, 그리고 원망의 눈빛. 

그녀는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고 쌩하니 자리를 떴다.  


터져 나와 흩뿌리고 싶은 피눈물이 가득 찬 내 두 눈알은 팽팽해지다 못해 곧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끝내 눈물 한 방울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내 손가락으로 두 눈알을 푹 찔러 터뜨려 버리고 싶다. 그렇게라도 나오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내 피눈물을 꺼내 주고 싶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그대로 고개를 박고 쓰러져 버렸다. 


그렇게 돌아왔던 그녀는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떠도는 소문 속 그녀는 "이혼녀가 되니 개나 소나 다 덤빈다"라고 말하며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인간이 되어 돌아온 여신 앞에, 인간으로 마주 서지 못하고 개나 소로 강등되어 버렸다.  

그렇게 울고 싶던 그 순간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 수 있었다면,  인간이 되어 돌아온 나의 여신을 안아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개나 소일뿐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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