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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11. 2021

아, 뮤즈를 놓쳐버린 허망함이여

뮤즈,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딸

어느 날 그녀는 그렇게 내게 왔다. 


아마도 네루다의 '시'였을 것이다. 그 '시'를 빼고 '시'를 얘기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나였으니, 시 수업 첫날 낭송했던 시는 분명 네루다였을 것이다.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이쯤이었을까?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문이 '삐걱'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공기 중을 부유하듯 가볍게, 그녀는 나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너무나 가벼운 움직임이라, 어느 누구도 그녀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어. 공기 중에 퍼뜨린 결들이 너무도 미세했기에. 그녀는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기색 하나 없이, 마치 자신의 순서를 알고 등장하는 연극배우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섰지.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신비로운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갑자기 적멸하는, 참으로 오묘한 순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짧은 순간 내 영혼 안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게 뭔지는 잘 몰랐지만, 직감적으로 내게 꼭 필요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학생들은 시를 음미하는 듯, 네루다를 묵상하는 듯, 그 정적을 고요히 견뎠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그녀는 내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나는 허둥지둥 강의 노트를 보며 다음 할 얘기들을 두서없이 꺼냈다. 


아폴론과 뮤즈들


"우리 아빠는 이 여자 저 여자를 넘나드는 바람둥이였어요. 엄마는 아빠의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자였고요." 


수업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술자리에서 그녀는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사내들의 이야기는 종종 들어 보았지만, 젊은 여자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여러 '바람'의 이야기라니. 뭐랄까 쌀밥 속에 끼어든 보리쌀처럼 혀 위에서 한참을 섞이지 못하고 탱글탱글하면서도 까끌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 이질감이 싫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분명 아니었다. 그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감촉을 즐기며 한참을 혀 위에서 굴리다 마침내 '톡' 하고 터뜨렸을 때의 그 맛이란……. 술잔을 들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혀 위에 얹힌 무언가를 한참 동안 굴려보았다.  


"남자가 너무 섹스를 밝히면 딸만 낳는다는 속설이 있던데…그 때문인가 봐요. 우리 집이 딸 부잣집인 건… 그나마 내가 첫째라 다행이라 여기고 있어요… 뭐랄까, 왠지 좀 더 순정한 피가 아닐까 해서. 뭐, 그런 생각 자체가 착각이겠지만." 


그녀가 쏟아내는 그녀 아버지의 비행 중에는 그녀보다 어린 여자와의 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낯 뜨거운 이야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니 자연스러움을 넘어 속 시원하고 후련하게 풀어내는 사람을, 그것도 젊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적당한 추임새나 반응을 제대로 넣지도 못하며, 시선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그런 세속의 반응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자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 역시 그 어떤 반응이나 질문도 하지 않은 채, 보통 사람이라면 불편해하며 피해버릴 시선을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던졌다. 그녀의 입술을 오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빠의 정사 이야기로 소설을 한 열 권쯤 쓸까, 생각 중이에요. 한 번쯤은 아빠한테 소설 써야 하니, 그 여자랑 하는 장면 한 번 보여줘, 할까 싶어요. 방해 안 하고 조용히 옆에 앉아 그 모든 장면을 관찰하고 적는 거죠. 예순이 넘은 아빠가 나 보다 어린 그 애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요?" 


주변의 무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가 문득 질문을 던지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가 눈웃음을 흘렸다고 하면 그건 나의 착각일까? 딸처럼 어린 여자애에게 손을 대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궁금하다고 맞장구를 쳐야 하는 걸까, 다른 이들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질문을 외면해야 하는 걸까? 


외면도 대답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로,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술에 고정된 내 시선을 조금도 틀지 못한 채, 난 다시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조그맣고 동그랗게 오므리다 곧 양끝으로 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그녀의 미소에 그렇게 가슴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평소에 미인으로 여기는 그런 얼굴형은 아니었다. 몸도 마른 나뭇가지 같이 앙상해, 풍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내 긴장을 풀어지게 해, 깊은 심연을 부유하게 만드는가 하면, 눈만큼은 1초도 깜빡이지 못하게 뜨고 시선을 고정해야 할 만큼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목소리다. 풀어짐과 긴장을, 팽팽함과 느슨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모순을 강요하는 목소리. 


술잔을 꽉 움켜쥔다. 힘을 주어 절제하지 않는다면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뻗어나가 그녀의 입술에 결국 손을 대고 말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이대로 계속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가는 내 손 안에서 술잔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바람처럼 왔으니 이제 바람처럼 떠날 때가 되었네요." 


그녀는 정말 바람처럼 몸을 일으켜 바람처럼 술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난 다른 학생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작정 그녀 뒤를 쫓아 나갔다. 어찌 그리 동작이 빠른지 그녀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바람처럼 떠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나는 혹여 그녀를 놓칠까 두려워 달려갔고, 마침내 그녀의 팔을 잡아 그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녀는 무심히 얼굴을 돌리고, 그 투명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혹이나 의문이 없는, 지극히 맑고 투명한 눈빛이었다. 


"이, 이름이...." 

겨우 내 입을 빠져나온 말의 어처구니없음이란. 

"후훗." 

그녀가 웃었다.  

"아, 아파요. 이거…." 

그녀가 가리키는 건 내 손이었다. 그녀의 팔을 여전히 놓지 않고 꽉 잡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라 손을 풀었다. 

"칼리오페? 후훗."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녀가 다시 한번 웃었다. 

"나 좋아하죠? 당신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나 우리 아빠 딸, 상대의 피를 뜨겁게 하는 법을 알죠. 후훗."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내 안의 모든 피가 뜨겁게 달궈지며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것만 같았다. 

"난 우리 엄마의 딸도 돼요. 모든 걸 그저 기억하기 위해 저지르죠. 사랑도, 욕망도, 그 무엇도… 오직 기억 안에서만 살아 있어요. 내 안엔 '머무르는 피'가 없어요."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그 순간 나는 드넓은 우주 안에서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그녀를 놓고, 온몸과 영혼이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상태로, 그렇게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머무르는 피'가 없는 그녀를 그렇게 움켜쥐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천재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확신이 온몸을 휘돌아 나왔다. 움켜쥐고 싶다. 꽉 움켜 잡아, 아무도 모를 내 주머니 안에 쏙 집어넣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머무르는 피'가 없는 그녀를 내 안에 영원히 '머무르게' 하고 싶다. 


그 순간 지난 십여 년 간 단 한 줄도 나와주지 않았던 문장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너무도 놀라 내가 망연히 그 문장을 혀끝에 놓고 굴리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막연히 동쪽 하늘 어스름 가운데 빛의 잔영이 남는 것으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짐작해 볼 뿐이다. 


뮤즈들


나의 뮤즈,  

제우스와 므네모시네(기억)의 사이에 태어난 딸

아름다운 목소리, 나의 칼리오페. 


십여 년 만에 '툭' 나타나 겨우 단 한 줄의 시를 남기고는 또 사라져 버렸다.  

아, 뮤즈를 놓쳐버린 시인의 허망함이여. 


(* 파블로 네루다 '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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