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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18. 2021

"얘, 한국에선 그지 같은 남편이라도 있어야 돼!"

내 인생 제일 길었던 하루

"얘, 대한민국에선 그지 같은 남편이라도 있어야지, 남편 그늘 없이 여자가 혼자 살아간다는 게, 그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우리 애 아빠가 마침 좋은 사람이 있다니까,  한 번 만나봐. 뭐,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남자 친구 하나 있음 좋지 않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경희의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어, 한 음절 한 음절이 가슴을 꼬집는 것 같다. 


종합병원에 붐비는 환자들처럼, 그곳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받은 번호는 45번. 내 뒤로도 수십 명은 더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결국 나와 같은 신분이 될 터였다. 그곳은 정말 병원처럼 시끄러웠다. 우는 사람, 서로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사람, 다시 돌아가는 사람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두 마음이 뒤섞여 마음자리가 어수선했을 뿐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내 차례가 다가왔다. 


"두 분 서로 이혼에 합의하시나요?" 

"네." 

"네." 


남편의 청혼을 받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밤들, 그리고 남편과 아내로 함께 한 그 길고 기나긴 세월들. 그 시간들을 정리하는 절차는 의외로 지나치게 간단했다. 이제 구청에 이혼신고만 하면 일주일 이내로 정리된다고 한다. 다 정리되었다고 연락조차 해주지 않을 만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도 한다. 이제 호적이라는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기에, '일가창립'이니 뭐니 하는 개념 자체도 소멸되었다.  


신고를 마치고 구청을 나오는데, 어쩐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떠올라 비추던 햇빛의 빛깔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이제 내 나이 50, 이혼녀가 되었다.  


경희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같이 다닌 동창이자 단짝 친구로, 경희의 남편과 우리 부부 넷이서 부부동반으로도 꽤 자주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서로의 집에 초대되어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마작이나 포커 같은 것을 하며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제주도나 강원도, 그리고 해외로 여러 번 같이 여행을 갔다.  


경희 남편은 키가 작달막한 데다 넓적한 얼굴에 납작한 코 하며, 가끔 농담이라도 던지면 나는 자꾸만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경희는 저 남자가 뭐가 좋다고 결혼한 걸까?’ 생각하느라 경희 남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넷이 부부동반으로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평소 잘 끼지 않는 남편의 팔짱도 괜히 껴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훤칠하게 잘 생긴 내 남편은 온데간데없다. 못생기고 땅딸한 데다 농담조차 웃기지 않는 남편조차 내 옆에 없어, 경희가 내게 충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못된 지지배, 누가 그걸 모를까 봐…" 


구청 밖으로 걸어 나와, 평소와 다른 빛깔의 햇살을 받으며 길을 걸었지만, 딱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집으로 가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왠지 휑한 집 안으로 오늘만은 혼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혼자가 된 첫날이자, 홀로 된 기념일이지만, 그런 날 정말 보란 듯이 대낮에 혼자 집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경희 남편이다. 전화번호는 진즉에 입력해 놓았지만, 수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휴대폰을 울려본 적 없는 번호다.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와라도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집사람이 전화로 얘기했다고 하던데… 오늘 저녁에 데리고 나갈게요. 나오세요." 


생각해보겠다고 미루며 정중히 거절할 마음이었는데, 다짜고짜 약속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끊어 버리는 통에 제대로 거절도 하지 못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속는 척하고 나가보기로 했다. 깔끔한 한정식 집에 예약자 이름을 대니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5분쯤 일찍 도착했는데, 경희 남편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아 방을 둘러보지만, 다른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 세팅도 두 사람 몫으로 되어 있는 것이, 데리고 나와 소개해준다던 남자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뭐, 사정이 있어 취소되었겠지 생각하며,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했다. 못 이기는 척 나오긴 했지만, 지금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무엇보다 지금은 솔직히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 


식사가 나오고, 뭐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어색하게 이어졌다. 혼자 있기 싫은 날이고, 단짝 친구 남편의 호의니까 앉아 있어주긴 하지만, 앉아 있는 내내 눈과 귀가 괴로웠다. 번들거리는 얼굴에 삐져나온 코털이며, 음식을 씹을 때마다 '쩝쩝' 거리는 소리하며... 조금 전까지 전화로 남편 있다고 유세인가 싶어 얄미웠던 경희가 갑자기 가엾게 느껴졌다. 이런 남편이라면 없는 쪽이 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루 종일 처량했던 내 신세가 조금은 위로되었다. 


그때, 계속 뭔가를 머뭇거리고 괜히 물 잔을 연거푸 들이켜고 하던 경희 남편이 입을 열었다. 


"그 친구 오늘 일부러 안 데리고 나왔어요. 그 친구 소개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좀 미애 씨랑 자봐야겠어요."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몇 마디 구체적으로 이어나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걷는데 눈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화끈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쏟으며 밤거리를 걷는 것도 흉한 몰골이란 생각에 택시를 잡아 탔다. 집주소를 겨우 말하고 뒷자리에 앉아 흐느끼는데, 룸 미러를 통해 보이는 택시 기사의 눈길도 소름 끼치게 무섭다. 무작정 차를 세우고 도중에 내렸다. 눈물은 멈추질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전화를 걸 곳조차 없다. 더 이상 남편이 아닌, 남남인 남자에게 전화를 해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모든 고민을 들어주던 경희에게 전화를 걸어 "네 남편이 글쎄…" 할 수도 없다. 


못된 지지배, 유세하나, 하며 얄밉게 느껴졌던 경희의 충고가 갑자기 뼈저리게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하루. 이제 겨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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