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녹색 눈의 괴물
분통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녀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강의실 저편에 그녀가 멍하니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보였습니다. 마침 그날 아침 멀리 한국에 있는 집에서 가족들이 소식을 전해왔기에 나 역시 그녀 만큼이나 멍하니 앉아 있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병상련을 느꼈습니다. 아니,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와 모국어로 실컷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에 그녀 곁으로 다가갔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자 그녀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밝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녀는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내게 깍듯이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공손하게 대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학년으로 입학했고, 키는 나보다 5센티는 더 컸지만 말입니다.
“이게 마지막 수업이면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그냥 울적한 마음이나 달랠까 같이 저녁을 먹기 시작한 것뿐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 앞에 있으니 평생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집안의 수치와 비밀이 술술 나오는 겁니다. 심지어 평생 세 번밖에 흘릴 수 없다는 남자의 눈물까지 주책없이 그녀에게 보이면서 말입니다. 그날 그녀는 내 눈에 분명 하늘에서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그녀 앞에서 털어놓을 때는 시원하고 후련했는데, 막상 다 털어놓고 나자 묘한 심리가 발동했습니다. 뭐랄까, 부채의식 같은 걸 털어내고 싶달까. 나 혼자 일방적으로 내 비밀을 까발린 것 같아, 그녀에게서 뭐라도 알아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왜 그리 멍하니 앉아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별 것 아니라고 계속 웃으며 말꼬리를 돌리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통장을 확인하니, 57불 남았더라고요.”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인생 한 번 바꿔 보겠다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 어렵게 유학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한국인 동기들에게 얼핏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거라면… 이제 졸업도 1년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빌려 줄게.”
속 섞이는 집안 식구들이 문제지, 내게 돈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사양하던 그녀는 세 번쯤 다시 권하자, 졸업 후 바로 갚겠다며 내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집안 문제로 속상할 때마다 털어놓을 곳이 생겼기에 그녀를 불러내 털어놓고는 했습니다. 그게 횟수를 거듭하다 보니, 그녀에게 호감 같은 게 생겼습니다. 그녀의 손을 덥석 잡을 때도, 차가 없는 그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키스를 할 때도 그녀는 잠시 움찔할 뿐 가만히 있었습니다. 구질구질 가난하고 속 썩이는 건 시골에 두고 온 가족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역시 가난하고 집안일이 복잡한 그녀를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아는 사람이 볼까 쉬쉬하며, 그녀와 이야기할 때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고 나가곤 했죠. 어느 날 차 안에서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더듬었습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그리고 다리 사이에 있는 그 깊고 뜨거운 곳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졸업이 가까이 오자,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쁘고 말도 잘 통하고 어린 여자 친구 물론 좋지만, 이 나이에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계속 만날 수는 없다 여겼으니까요. 그녀가 좋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그녀와 결혼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이 한 달쯤 남았을 때였나. 그녀가 갑자기 빌렸던 돈에 내가 말했던 이자까지 정확히 더해서 내 계좌로 보낸 것입니다. 얼마 전 본 인터뷰에서 합격해 취직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달랑 이메일 하나로 감히 나를 차 버린 겁니다.
“선배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선배님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졸업 후 계속 만날지 말지 고민 중이긴 했지만, 아직 졸업까지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리고 자기가 어려울 때 내가 죽을 뻔한 걸 살려준 은인인데, 자기 멋대로 나를 차? 처음에는 차를 몰고 그녀를 쫓아 미행하려 했지만, 직장이 해결되자 그녀는 수업에도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기숙사에 처박혀 잘 나오지도 않는지 그녀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기숙사로 달려가 그녀를 찾아내 걷어 차고, 목을 조르고, 얼굴에 염산 따위를 부어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야만인은 아닙니다. 나는 물리적 폭력을 쓰는 이들을 경멸하는 쪽으로, 모든 문제는 머리를 써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결국 해냈습니다. 그녀의 이메일을 해킹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아니, 근데 이 미친년이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는 남자가 한둘이 아닌 겁니다. 주로 같이 수업을 듣는 외국인 남학생들이었는데, 그년이 얼마나 꼬리를 치고 다녔으면, 저녁을 같이 먹자, 영화를 보자, 수작을 거는 놈들이 한둘이 아닌 겁니다.
"오! 왕이시어, 질투를 주의하옵소서. 이는 거짓을 행하는 녹색 눈의 괴물입니다.”
-셰익스피어, <오셀로> 중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면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이메일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건 거짓말이며, 그런 사랑은 거짓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이 '녹색 눈의 괴물’이 내 안에 들어오자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모욕감, 불안, 두려움, 슬픔, 분노, 고통과 비탄, 자기 비하, 압박감, 상실감, 염려, 조울, 부끄러움, 초조, 성적 욕구, 공포, 의기소침, 배신…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녀와 한 번이라도 사적인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놈들의 명단을 리스트업 해서 새로운 이메일 계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클린트.이스트우드@yahoo.com
조니.뎁@hotmail.com
브래드.피트@aol.com
…
그리고 클린트의 이메일 계정으로 조니에게, 조니의 이메일 계정으로 브래드에게… 이메일을 보냈죠. 내 여자 친구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고…
존경하는 재판장님,
나는 순수하게 그녀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질투가 없다면 그건 사랑도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내 앞에서 꼬리를 치다 쓸모가 없어지자 걷어 차 버리는 그녀에게 잘못이 있지 저는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그녀에게 손끝 하나 건드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메일 주소를 꼭 제 이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이렇게 피고가 되어 법정에 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염산을 얼굴에 확 부어버릴 걸 그랬다 후회가 되네요. 그럼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지… 씨x. 어디서 나를 감히 걷어 차! 차도 내가 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