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고 있다는 착각, 즐거움을 반감시킨다

여행의 남은 절반, 모르는 걸 알아가는 설렘으로

by 윤소희

무슨 일이든 실제로 할 때보다 그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기대하는 시간이 더 즐거운 게 아닐까.


8년째 아이들과 한 달 여행을 하고 있다. 매년 여행 후에는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고, 새해가 되면 그 해의 여행을 계획하면서 즐거워한다. 우연히 프랑스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와’하는 말을 던질 때 잡아채거나, 싱가포르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하고, 영화 속 멋진 장면이 웨일스라는 걸 발견하기도 하면서 매년 설렘으로 여행 계획을 짤 수 있었다. 마치 1년이 여행을 하는 7월 한 달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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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프랑스, 웨일스 여행 중


작년부터 팬데믹 특수 상황이 되면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 작년에는 머물고 있던 한국 국내 여행으로, 올해는 중국 국내 여행으로 목적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이 예전과 달라졌고, 그 점이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켰다.


(2020년 전라도 한 달 여행기를 보시려면)

https://brunch.co.kr/brunchbook/pandemictravel


사실 한국이나 중국 국내 여행이라 해도, 낯설고 멋진 여행지가 많이 있다. 하지만 ‘국내 여행’이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어디를 가든 이미 '익숙하고 새로울 게 없을’ 거라 지레짐작하게 된다. 기대할 게 없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지루한 여행자만 있을 뿐 지루한 여행은 없다’라고 큰소리쳤지만, 기대함이 별로 없었기에 여행 전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어떤 곳을 찾아갈지, 무엇을 먹어볼지... 여행 전 기본 숙제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서 되는 대로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컸던 것이다.


실제로 하이난(海南) 여행은 대체로 그렇게 흘러갔다. 베이징에 있을 때처럼 ‘띠디(滴滴出行)’를 불러 타고 목적지를 가고, ‘메이투안(美团)'으로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낯설거나 새로운 일이 없었다. 막힌 변기를 뚫는 일, 정전이 되거나 와이파이가 끊기는 일쯤은 당황스럽긴 해도 여행지에서만 특별히 생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으른 여행자인 내가 바로 ‘지루한 여행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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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난(海南)의 링쑤이(陵水)


중국에서 15년쯤 살았다고 해서 내가 제주도보다 스무 배나 큰 하이난이란 섬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당장 링쑤이(陵水)에 들어와서야 싼야(三亚)에서 가까워도 메이투안조차 안 된다는 걸 처음 알지 않았던가. 이곳 사람들의 중국어 발음이나 억양이 특이하지만 정확히 어떤 사투리를 쓰는지도 모른다. ‘수영금지’라고 써놓은 해변에 들어가 발에 물을 담그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어디까지 들어가면 수영이니 안 되는 걸까. ‘수영금지'라면 파도타기는 되는 걸까. 프로젝터로 벽면 전체에 화면을 띄우고 록 콘서트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 일주일 만에 마작을 정말 마스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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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쑤이 숙소의 마작 테이블과 프로젝터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니, 아직 나는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설렘과 기대를 앗아가지만, 잘 모른다는 생각은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여행지뿐 아니라 사람과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결혼 생활에서 권태를 느끼는 건 상대를 다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모른다는 마음으로 궁금해할 때 상대는 무궁무진한 탐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의 남은 절반, 모르는 걸 알아가는 설렘으로, 즐거움을 기대함으로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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