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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Sep 24. 2022

2-11. 무수천, 느닷없이 빠져버린 고요

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11. 무수천느닷없이 빠져버린 고요     


     

나긋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나였지만 제주에 와서는 나름 느긋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마음이 조급했고 보란 듯이 사고가 생겼다.      


2002 월드컵 전후로 축구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프로축구 수원삼성블루윙즈를 계속해서 응원해 왔다. 삼십대의 나에게 축구경기 직관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일주일간 삭이고 억눌렀던 감정들을 주말 응원석에서 노래하고 뜀뛰며 분출했다. 매치데이가 되면 하루 종일 기대감과 불안감에 심장박동이 커졌고 시간이 되면 미친 듯이 차를 운전해 경기장으로 향했었다. 제주로 이사를 온 후, 더 이상 수원 빅버드에 갈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수원삼성블루윙즈 축구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했다. 이런 내게 일년 두어번 있는 수원의 제주원정은 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아 경기가 있기 전부터 손꼽아 기다려왔다. 매치데이, 시간이 되자 일주도로를 달려 서귀포 월드컵 축구장으로 갔다. 왜 이리 마음이 쿵쾅댔는지 느긋하게 가야 하는 길에 조급증이 크게 일었다. 불행하게도 신호등 없는 좌회전 진입로가 있는 도로에서 왼쪽으로 진입하기 위해 정차한 앞차를 뒤에서 추돌하고 말았다. 차 두대 모두 많이 부서졌다.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왔고 119 구급차도 왔다. 조급함에 엑셀을 밟아 죄인이 되었다. 보험료가 크게 할증이 된다 했고 나에게는 범칙금과 벌점이 부과되어 교통안전교육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제주 시내 외곽에 소재한 교통안전공단에서 안전교육을 받다가 점심시간,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날 왜 조급하게 엑셀을 밟으며 운전을 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제주까지 와서 죄인이 된채 처벌받고 있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났다. 점심밥 먹을 생각도 없어 방황하다가 가까운데 있는 무수천을 찾아 갔다.      


무수천(無愁川)! 복잡한 인간사 근심을 없애준다는 내창.


방랑하는 발걸음이었는데 내창은 내 처지에 딱 어울리는 장소였다. 한라산 어승생악부터 시작된 물줄기가 바위틈을 깎아 흐르고 고이며 돌아 바다까지 내려가는 거친 내창인 무수천은 절경이었다. 그리고 고요였다. 제주 고속도로 같은 서부산업도로가 가로지르는 곳인데도, 무수천에 접어들자 방금전까지 사위를 떠들썩하게 하던 차들의 질주 소리, 사람들의 소리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느닷없는 고요가 나를 찾아왔다. 바위와 내를 뜀뛰기로 걸어 상류쪽으로 향해 가니 너럭바위들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이곳에서 혼자 우두커니 오래 앉아 있었다. 나를 초대한 느닷없는 고요 속에 빠져 있다보니 하루내 일었던 마음속 풍랑이 잠잠해졌다. 짜증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밀려들었다. 아무도 없는 계곡. 가물어 계곡의 물소리조차 잦아든 오후. 십 여분의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무수천은 내게 깊은 휴식을 건네주었다.      


“근심이 있다면 무수천에 다녀오세요.


아무도 없을 때, 아마 보통은 아무도 없는 곳이지만,

느닷없는 고요함이 휴식을 가져다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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