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사람들은 호기심 덩어리다. 모두 관계를 맺는 다른 이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다.
제주에 이주한 후 한동안, 가족, 친구, 이웃,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설명을 해야만 했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왜 제주에 갔는지, 제주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주 사람들에게는 ‘왜 제주로 왔는지, 육지에서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 가족을 아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제주살이는 충분히 호기심 거리가 될 만했다.
“인생 후반전을 잘 살고 싶어서 잠시 쉬러 가요. 직장은 육아휴직 했고요. 살림 정리해서 지금은 제주도 성산일출봉 근처, 마당 있는 시골 마을에 살아요. 초등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이 셋 있는데요. 시골이라 학원도 없고요. 천연잔디 깔린 예쁜 학교에 보내요. 한 학년에 열 명 안되는 작은 학교,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 이름을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아이들은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놀아요. 우리 부부는 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제주 여기저기를 유랑하며 잘 지내고 있어요.”
꾸미고 단장한 이야기에 우리 집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부러워했다. 바쁘게 돈을 벌고 힘들게 아이들을 키워 내야 할 마흔 초반에 마냥 쉬려고 제주도로 이주한 우리 부부를, 누구는 믿을 구석이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류로, 누구는 아이들 교육에 소신 있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로 오해하곤 했다.
아니다. 나는 십 년 넘게 한 회사만 우직하게 다녔던 소심한 샐러리맨이었고, 하루하루 버겁다는 핑계로 인생 설계는 언감생심이었던 대책 없는 사내일 뿐이었다. 아이들 교육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 부담되는 교육비와 아이들이 뒤처지면 어쩌지 하는 근심 사이에서 태권도와 피아노, 유치원, 어린이집으로 적당히 타협한 보통보다 못한 부모였을 뿐이다.
못난이 남편과 아빠라서 마음에 병과 번 아웃까지 겹친 직장생활이었음에도 사표 던질 용기가 없어 육아휴직을 내고 제주로 도망치듯 이주를 했다. 제주가 주는 싱그러움에 정신은 치유가 되고 몸도 잘 놀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앞으로 뭐 먹고 살지?’ 하는 큰 혹 같은 걱정거리를 매달고 허우적대는 것은 육지나 제주나 마찬가지였다.
온평리 시골 마을에는 우리처럼 아이들과 함께 이사를 온 육지 출신의 가정이 여럿 있었다. 언뜻 보기에 이들 가족 역시 걱정 근심이 없는 태평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옆집 승주아빠는 곰 같은 딴딴한 체형이었는데 입꼬리가 항상 올라가 있는 웃는 상이어서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여유롭게 캠핑을 다녔고, 손이 커서 가끔은 한 냄비 가득 맛있는 음식을 아이 통해 전달해 주기도 했다. 한여름 맹렬한 햇빛만큼 까만 학부모가 있어 물어보니, 스노쿨링과 서핑에 빠져있다고 했다. 노아 엄마는 사려니 숲을 좋아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숲길을 걷는다고 했다. 겁 많아 혼자 걷기 무서워하던 아내는 노아 엄마를 따라 숲길을 다니며 숲과 편한 사람이 주는 안도감에 정서적 치유를 받곤 했다.
마을에서 만난 이웃들은 우리가 제주에서의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창이 되었다. 그 창을 통해 다양하게 펼쳐진 제주 인생을 볼 수 있었다. 작은 마을, 작은 학교에서 만났지만, 아이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다들 유쾌해 보였고 하릴없고 걱정 없는 가족들 같았지만 시간이 흘러 속내를 조금 내보일 만큼 친해지자 내 부족함과 상처만큼 대부분의 가정이 아픔과 말못할 속사정을 안고 있었다. 일부는 제주에서 치유중이었고 더러는 생채기가 곪는 아픔을 감내하고 있기도 했다.
제주 성산 작은 학교에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집을 저렴하게 빌려주었던 동네 사정상 이런저런 이유로 싼 집을 찾는 가정들이 다수 모이게 되었다. 육지에서 하던 사업이나 가게가 어려워 정리하고 제주를 찾은 가장들도 있었고,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온 아빠들도 있었다. 나처럼 이들은 제주를 풍성히 누리고 있었지만, 나처럼 역시 ‘생계’에 대한 걱정들을 한아름 안고 있었다. 엄마와 아이들만 내려온 경우도 많았는데, 대부분 아빠들은 육지에서 돈을 벌다가 주말이나 대소사가 있을 때 휴가를 내고 제주에 내려왔다. 이런 가정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마치면 다시 육지의 집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그만큼 제주정착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픔이 가득한 집들도 많았다. 부모가 이혼 후 내려온 가정도 있었고,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육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자 제주로 내려온 경우도 많았다. 할머니가 키우는 조손가정도 있었다. 아이들은 제주에서 천진난만하게 자연을 벗 삼아 놀기도 했지만 결핍과 무관심속에 방치되기도 했다. 학교를 파한 큰아이를 기다리다가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내뱉던 욕설을 듣고 크게 놀랐다. 제주 할망 입에서나 들을 법한 사투리 섞인 찰진 욕설을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주고 받는 모습에 민망함을 넘어 혹 우리 아이들도 아빠 없는 곳에서 저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슬쩍보면 다들 여유롭게 보였지만 살짝만 들춰보면 짠한 속사정들이 다 있었다. 이웃들은 서로의 속내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옹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이루기도 했지만 때로는 다가서다가 상대의 날 선 가시에 찔려 아파하기도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든 똑같구나 체념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던 건 우리 가족의 아픔을 제법 잘 어루만져 준 오름과 바당, 한라산과 숲이 있었기에 제주에 사는 것이 감사했다.
"여전히 내 자신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난 나를 사랑해. 그래서 스스로 보듬고 하루를 더 알차게 살고 싶어.
이것이 제주에서 사는 이유 같아.“
말못할 속사정은 여전하지만 제주는 얼굴에 웃음꽃을 선물해 주었다. 파안대소하는 것은 이제 내 몫이라 생각하고 의지를 내 웃었다. 그래서 행복하고 감사했다.
제주에서의 삶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