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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Sep 29. 2022

2-14. 금빛 향연, 억새와 함께 춤을

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14. 금빛 향연억새와 함께 춤을




11월, 억새는 바람에 춤을 춘다. 제주섬의 오후, 해가 뉘엿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동쪽 수산리 난드르를 가득 메운 억새꽃들이 볕을 등진 채 눈부시게 피어났다. 햇빛에 찬란하게 부서진 억새꽃은 화선지에 묵 스미듯 아늑한 온기로 사위을 채워주었다. 아무도 없는 난드르의 외딴 길 위에서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 억새의 하늘거림에 맞춰 폴짝폴짝 뜀을 뛴다. 나긋한 낭만 속,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내 마음을 피사체에 투영하여 카메라로 담아보고 싶었지만 졸렬한 내 시선과 기술로는 향긋한 이 느낌을 담을 수 없었기에 안타까웠다. 그래도 좋았다. 햇빛과 바람, 흔들리는 억새밭에서 나는 춤추고 있었으니까.




제주에서 살아보니, 섬을 만끽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11월의 늦가을이다. 날은 청명하고 쾌적하며 시원하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옛말을 제주에서는 실감할 수 있다. 좋은 시절, 단풍을 휘감은 육지와 다르게 제주는 억새의 물결이 차고 넘쳐 곳곳에 흐른다. 만사를 제쳐놓고 억새구경을 다녀야지! 억새꽃이 하얗게 피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향연에 초대받은 오늘. 중산간 난드르와 오름을 김영갑 작가처럼 배회했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을 마친 오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아끈다랑쉬 오름에 갔다. ‘아끈’은 제주말로 ‘작은’이라는 뜻이니, 아끈다랑쉬오름은 ‘작은 다랑쉬오름’을 말한다. 제주 동쪽 오름들을 아우르는 오름의 제왕 다랑쉬오름 옆에 낮게 딸려 있어 ‘아끈다랑쉬오름’이라 하지만, 다랑쉬오름에서 조망할 때 예쁜 하트 모양의 탐방로가 멀리는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비롯 가까이는 제주의 들판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보석 같은 오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억새가 만발하는 가을. 더해서 청명한 하늘까지 펼쳐진 날이라면,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오름에 버금가는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해 준다. 오르는 길이 정돈되지 않아 미끄러웠지만 야트막한 오름에 올라서면 하트모양의 굼부리를 한 바퀴 돌다가 아이들 키를 넘기는 무성한 억새밭에서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아내와 함께 걷는 날, 가시리 갑마장 길을 걷다가 따라비오름에 올랐다. 갑마장은 최상급의 갑마(甲馬)를 키우던 목장을 말한다. 제주의 대표적인 방목장이었던 가시리에는 목장 경계로 쌓은 잣성들이 한라산을 정점으로 연이어 둘러 있다. 그중 짧은 갑마장 길은 큰사슴이오름과 잣성을 거쳐 따라비오름을 트래킹하는 코스인데, 오름의 여왕을 알현하러 가는 설렘을 이 길에서 충만히 느낄 수 있기에, 여유를 가지고 억새가 만발한 갑마장 길을 걷는 것이 걸어 좋다. 커다란 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는 억새가 가득한 가시리 들녘을 잣성길에 기대 걸으며 삼나무 터널을 지나 따라비오름을 마주하면 더 특별한 감정들이 새록새록 넘쳐나기 때문이다.     

 

땅할아버지 오름이라는 민간어원을 가진 따라비오름은 이름과는 다르게 용눈이오름에 버금가는 부드러운 산세와 굼부리를 가지고 있어 오름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근처 오름 군락에는 며느리오름이라는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이 대가족처럼 모여 있으니, 따라비 라는 이름이 제법 어울린다. 이제 따라비오름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서 우리뿐 아니라 많은 여행자들이 오름과 억새를 만끽하고 있었다. 멋을 함께 하는 기쁨이 있었지만 고요하던 옛 시절 굼부리 곳곳에서 껑충 뛰던 노루들은 간 곳 없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억새풀이 사위어 가는 따라비 오름에서 나와 아내는 아직 오지 않은 인생의 늦가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은빛 백발이 잘 어울리는 노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듬성이고 휑해도 괜찮아?”

“주름 가득하고 야위어도 석양처럼 순하고 따뜻했으면 좋겠어. 내 삶이......”

“제주에서?”

“응......”



혼자 무작정 걷고 싶을 날, 동거문이 오름에 올랐다가 반대편의 난드르를 헤맸다. 용암이 급하게 폭발한 것 같이 낭애처럼 솟구친 굼부리 동편으로는 황금빛 구릉지대가 나지막하게 펼쳐져 있다. 난드르에는 마소를 방목하는 바랜 목초지와 주로 무를 파종한 푸른 밭들이 검은빛 밭담으로 얼기설기 나누어져 있었다. 이곳은 오름의 군락지라 난드르 너머 사방에는 유명한 오름들이 봉긋 솟아올라 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름은 옛날 테우리를 품었고 오늘 나 같이 정처없이 헤메는 유랑객을 품어 주었다. 오름은 모두의 안식처다. 망자에게도 그런 모양이다. 동거문이 오름 동편 들녘에는 제주 전통의 묘지들이 넓직한 산담들을 두른 채 난드르 곳곳을 모자이크 마냥 빛내고 있었다. 포크레인이 다녀간 흔적으로 볼썽스럽게 이장 되버린 파묘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이끼 두른 동자석을 줄 세우고 현무암 덩어리 산담을 반듯하게 두른 봉분들은 위풍이 당당한 모습이다. 제주는 예전 벌초방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추석 보름전 주말에는 남자 일가친척들이 모여 벌초를 한다. 추석이 지난 11월이라 묘지들은 까까머리마냥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묘지마다 성묘를 하기 위해 길들을 내놓았기에 원래 정해진 길 없는 난드르를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볼거리도 유행을 타는지 제주 늦가을에 핑크뮬리와 팜파스그라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많은 카페나 관광지마다 한가득 이들을 심어 독특함을 보여 준다. 그래도 나는 제주 난드르가 품었다가 늦가을 한아름 꺼내 보이는 억새가 여전히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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