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이상했다. 완연한 가을빛이 물들던 어느 날인가부터 제주 정보지인 오일장 신문이 집문앞 작은 의자에 매번 놓여 있는 것이었다. 한두번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는데, 번번이 당일 발간한 따끈따끈한 오일장 신문이 놓여 있으니, 궁금하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누가, 왜, 정보지를 놓고 가는 것일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2층에 사시는 주인집 할아버지께서 귀가하시면서 가져다 툭 놓으시길래, 인사를 드렸다.
“한번 훑어봐. 할만한 일거리 있는지.”
여름내 하릴없이 놀고 있는 다둥이 아빠의 모습이 안돼 보였던 걸까? 더운 해를 피해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미깡농사를 지으시고, 해질 무렵이면 해변을 따라 걸으며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영감님 입장에서는 아이를 셋이나 둔 젊은 사내가 하루내 빈둥대는 모습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더해 앞길이 구만리인데 저치들은 뭐먹고 살려 하는 거지? 라는 걱정도 있으셨을 테다.
제주를 흔히 삼다도라 하는데, 혹자는 삼무도라고도 했다. 바람과 돌, 여자가 많은 삼다도에는 대문과 도둑, 거지가 없었단다. 신기했다.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섬에서 생활인으로 사는 건 쉬운 게 아님을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쌀을 자경할 수 없었던 척박한 곳, 지금까지도 변변한 산업이 없는 곳, 그렇다고 모두가 관광업에만 종사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제주사람 남녀노소 모두는 오늘도 부지런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옹이진 가지들을 한쪽으로 뻗쳐 억센 해풍을 견디고 마을의 수호신이 된 폭낭의 모습은 굴곡진 제주사람들의 삶을 대표하는 것 같았다. 강한 생활력, 섬이라는 폐쇄된 공간, 높은 자존감, 상부상조하는 문화 속에서 거지와 도둑이 있을리는 만무한 일이다.
시대가 변했어도 해녀삼춘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어촌계를 조직해 무리를 이뤄 물질을 나간다. 수십번 자맥질을 하며 미역이나 소라, 전복 등을 채취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넘실대는 파도위에서 물놀이를 잠깐만 해봐도 알 수 있다. 동네 삼촌들이 따 올린 온평리 미역은 예부터 맛있고 품질 좋기로 유명했다. 아이들 다니는 온평초등학교가 1950년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온평리 해녀들이 따로 학교바당을 정해 이 곳에서 난 미역과 해산물을 팔아 학교를 재건했다는 미담에서 보는 것처럼, 누구의 도움을 받는 대신 자신들의 힘으로 가정과 학교, 마을 살림들을 꾸려 나간다. 바당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삼춘들은 밭일을 한다. 자녀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면 한집에 살더라도 각자의 부엌을 가진다. 깊고 오랜 잠수후에 해녀들이 토해내는 숨비소리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꽃을 피워내는 제주 여성들의 삶이 녹아있다.
도시도 아니고 아직 옛 문화가 여전한 제주 시골 마을에서 우리부부의 무위도식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었다.
제주가 좋아 입도한 육지사람들이 주 사용자였던 네이버 카페 ‘산책’에는 좋아서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서쪽 고내리에 무인카페 산책을 열고, 온라인에도 같은 카페를 연 주인장 ‘산책님’, 우리가족의 입도 계기가 된 작은학교와 주택정보를 꾸준히 올려주었고 큰아이 중학교 진학상담까지 해 주셨던 교사이자 작가인 ‘제주원츄님’, 우리가 모르던 제주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제주비경을 소개해 준 ‘여름이좋아님’ 등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특히, 갑장이라 더욱 친근했던 ‘우편배달부님’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겪은 입도 선배였기에 나는 그로부터 늘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곤 했다. ‘우편배달부님’은 언제나 같은 코멘트로 날 응원해 줬다.
“지속가능한 제주의 삶을 응원합니다.”
이 문구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한창 제주붐이 불었던 당시,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제주로 이주했다. 살아보니 제주 시골살이는 육지와는 많이도 달라 장단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지만 쇼핑이나 문화생활은 포기해야 했다. 물가는 비싼데, 좋은 일자리는 드물었다. 여행객으로 하루이틀 놀기는 좋지만, 먹고 사는 생활인으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육지에서의 고단한 삶을 벗어나고자 제주를 찾았지만, 다시 제주에서 안게 된 새로운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이웃들이 있었고 오래지 않아 그중 대다수가 다시 육지로 귀향을 선택했다.
‘지속가능한 제주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안정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고갈되었던 삶의 에너지가 제주살이로 급속 충전되면서 다시금 삶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이때부터 나 역시도 지속가능한 제주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서귀포시가 여는 창업강좌를 신청하여 수강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젊은 친구들 속에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면서, 그간 막연하게 마음에 품었던 몇가지 창업 아이템들이 사업계획서로 구체화 되면서 산산이 조각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가벼운 고민은 큰 번뇌로 변해만 갔다.
가진 것 없는 상황에서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그리고 제주라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새로운 인생을 직조하는 것은 육지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제주에 입도했던 결심만큼 큰 용기와 의지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신발끈을 묶고 우선 길 위에 서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우선 제주 시골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보기로 했다.
우리보다 1년 먼저 온 제주에 입도한 용준이 아빠가 마을 펜션을 장기임차하여 리모델링을 한다고 해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용준이 아빠는 나름 기술자로 리모델링을 직접 시공하는데, 나를 보조로 써주었다. 십여년간 책상에 앉아 보고서나 만들고 기안, 계약서나 쓸 줄 알았던 나는 이쪽 일에서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자재를 나르고, 공구를 가져다주고, 합판을 들어주고, 청소를 하고, 페인트로 군데군데 땜빵을 하는 일 등, 서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루내 하고 십만원 정도의 일당을 받았다. 하루 땀 흘려 일한 일당은 회사생활을 통해 받던 월급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심리적인 돈의 가치가 커서 쓰기 아까울 정도였다. 첫날은 힘들더니 다음날에는 몇 달간 놀던 몸도 적응했는지 조금 이력이 붙었다.
‘건축일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아내에게 일당을 가져다주는 뿌듯함도 컸지만, 새로운 일에 당차게 도전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본격적으로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했다. 동네 삼촌들과 신산리 하우스 골드키위와 노지귤을 따는 일이었다. 아침 7시가 되면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인부들을 픽업하는 트럭에 올라타고선 해안도로를 달려 농장에 갔다. 수확을 바짝 해야 했기에 외국인 노동자부터 신혼의 젊은 부부, 나같은 중년아저씨, 입도한지 한달 밖에 안되었다던 또래 아줌마, 그리고 해녀 할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골드키위는 수확용 리어카 하나에 네명이 한조를 이뤄 일하는데, 주로 동네 5,60대 아주망들과 함께 일을 했다. 키가 커서 높은 곳에 달린 키위를 잘 딴다고 아주망들이 좋아라 했기에 나름 농장에서 인기가 있었다.
고당도 고품질 골드키위는 비싼 과일이라 수확과 동시에 바로 포장을 해서 외국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농장주는 일꾼들의 생산력을 높이고 달랠 겸 새참과 점심밥에 굉장히 신경을 써줬다. 9시가 되면 새참을 먹었다. 12시에는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면 또 새참을 먹었다. 먹는 만큼 단내나도록 열심히 일했기에 올챙이 같던 내 몸매도 점점 홀쭉해지고 있었다. 얼마 먹지 않아도 늘 더부룩했던 회사원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말이다.
찬바람이 불고 귤이 노랗게 익기 시작하자 노지귤을 따는 일을 했다. 여자들은 귤가위로 귤을 따고 남자들은 귤이 가득 담긴 컨테이너를 선과장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커서 상품가치가 없는 귤들은 그냥 따 떨어뜨리고 적당한 크기의 귤들만 컨테이너에 담는데, 수확한 나무마타 큰 귤들을 한아름씩 바닥에 떨어뜨리곤 했다. 하루하루 고되었지만 육체노동이 주는 희열감도 컸다. 몸이 건강해지고 팔다리 근육에 힘이 붙는 느낌이 들 때면 어깨와 허리 역시 반듯하게 펴지곤 했다. 밭일을 하면 파치를 많이 얻어오곤 했다. 양도 상당해서 파치를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달아 맛있는 파치귤을 귤상자에 담아 고마웠던 육지 지인들에게 택배로 부치면서 의미를 부여했다.
“이거 내가 직접 딴 귤이야. 맛있게 먹어!”
“이야. 맛있겠다. 잘 먹을께. 제주살이 어때?
”귤도 따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이게 제주사는 맛이지. 귤에 제주 바람도 실어 보낸다.“
통계청이 읍면에 위탁하여 실시한 전국 인구 총조사와 농촌 총조사 일을 짧은 아르바이트로 했다. 어둑해져 집마다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면 아내와 함께 성산 시흥리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통계청이 원하는 자료들을 직접 물어가며 기입하는 일이었다. 작은 마을 누구는 선원으로 일했고 누구는 밭일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도 있었고, 혼자 사는 분들도 있었다. 번듯하고 깔끔한 집들도 있는 반면에 누추한 집들도 있었다. 아직 알아듣기 힘든 원색적인 제주 사투리를 쓰는 분들도 있었고 우리를 배려해 표준말로 답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짧은 아르바이트 기간이었지만 제주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할 일은 많았다.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태반이었다. 상념은 커져만 갔다.
‘마흔을 넘긴 시점에 몸을 사용한 댓가만큼 받아야 하는 일당일들을 내가 꾸준히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일당으로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을까? 제주살이가 일상이 되면 육지에서의 직장생활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풀어내야 하는 숙제의 마감시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