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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Oct 01. 2022

2-16.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불타버린 마흔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16.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백수가 맞이한 제주 시골 첫해 겨울은 길고 무료했다. 바다 위로 떠오른 해는 게걸음 마냥 옆걸음만 걷다 다시 바다로 빠져 버렸고, 어둠은 삼복더위에 헐떡이는 시고르자브종 혓바닥마냥 길게 늘어나 캄캄한 밤 속에 나를 가둬 놓았다. 겨울이 들이닥친 포구와 중산간의 바람은 늘상 차갑고 매서워 옹송거리며 지냈다.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는 딱히 할 것 찾지 못한 몸을 자꾸 움츠러트렸고 종내에는 동그랗게 말려 곰벌레가 된 것 같았다. 겨울을 이겨낼 꾸준히 할 만한 무언가, 몸을 활짝 펴고 격한 숨을 몰아쉴 운동이 필요했다.     


어둑해진 저녁. 성산읍내를 배회하다가 불이 환히 켜진 초등학교 체육관 앞에 멈춰 섰다. 밖은 한겨울인데도, 유리창 너머로는 반바지와 반소매 차림의 동호인들이 땀을 흘리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중간중간마다 함박웃음 잔치를 벌이며 말이다. 겨울의 또 다른 별천지가 체육관 안에서 펼쳐진 것 같았다. 체육관에는 내게 필요한 활기가 활어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그래서 같이 뛰고 싶었다. 주뼛대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클럽의 회원들은 소심하게 같이 운동을 하고 싶다던 나를 살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렇게 배드민턴은 날 꼬셨고 이내 배드민턴과 사랑에 푹 빠져 버렸다.     


남녀노소 누구나가 공원 같은 여느 장소에서도 쉽고 가볍게 즐기는 놀이 같지만, 배드민턴은 의외로 격렬하고 체력소진이 심한 운동이다. 그리고 동호인의 세계에 진입하는 장벽도 꽤 높아서, 급이 다른 사람들이 코트에서 함께 어울려 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의 배려가 없다면 초심자들은 코트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남들 운동하는 걸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짐을 다시 싸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났다. 시흥리에서 밭농사를 하는 회장님, 고성에서 택시를 모는 코치님, 온평리 바닷가 앞 양어장 소장으로 일하는 삼촌 같던 형님, 동남 미용실 누님, 태권도 사범님, 하도리 펜션을 운영하는 잘생긴 동생, 신산리에서 유기농 귤농사를 짓는 백발 형님, 난산리에 타운하우스를 직접 지어 분양하는 친형 같던 형님 등 성산 토박이와 정착민이 어우러진 클럽에서 소심한 나도 은둔형 스타일에서 벗어나 재미나게 어울리게 되었다.     


“배드민턴 배운 적 있수꽈?”

“어릴 적에 조금 배워서 클리어는 칠 줄 압니다.”

“그럼 이리 왕 난타 한번 쳐봅써”     


허우대가 좋아 라켓을 곧잘 휘두를 것 같았던 건장한 이미지는 테스트 랠리 몇 번에 급속히 소멸되어 버렸다.      

“지금 바로 게임할 수 있는 실력은 안되마씸.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자주 나옵써!”   

  

이내 회원들이 게임을 하는 메인 코트에서 밀려났지만 마음씨 좋은 회원들이 번갈아 가며 보조 코트에서 난타를 쳐 주었다. 구력있는 오십대 누님이 네트 앞으로 살짝 놓는 드롭볼도 걷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던 몸과 둔했던 스텝이 민망했지만, 이내 앞뒤로 왔다 갔다 뛰는 재미와 라켓으로 콕을 때려 상대 네트로 날려 보내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심장이 쿵쾅거려 주저앉고는 했지만 헉헉대는 만큼 그 이상의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반사적으로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신체 알람이 울려댔다. 같이 어울려 운동을 할 수 있는 밤이 기다려졌다. 날이 지날수록 몸은 가벼워졌고 발걸음도 사뿐해지는 게 느껴졌다. 뱃살이 줄어 허리띠 구멍을 앞으로 하나 당겼다. 허벅지에도 바짝 근육이 올랐다.     


코치님은 소액만 받으며 레슨을 꾸준히 해 주었다. 하이클리어와 언더클리어를 다시 배웠다. 드라이브를 배웠다. 코트 좌우, 앞뒤로 날려주는 헌 볼을 때리며 로테이션을 배웠다. 형님들은 자신의 운동시간을 할애해 상대를 해 주었다. 그리고 가끔은 게임에도 끼워주며 날 배려해 주었다. 여전히 어설퍼 게임에 들어서면 민폐가 되고는 했지만, 콩닥콩닥 심장이 뛸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겨울이 지나자 왕초보에서 "왕"을 뗀 초보가 되었다. 쓰지 않던 몸을 그것도 주로 한쪽 몸에 힘을 주다 보니, 왼손잡이인 나는 왼쪽 어깨와 무릎, 발목이 쑤셔왔다. 그래도 좋았다. 몸이 많이 결리고 아픈 날이면 동네 해녀 할망들이 자주 다니는 읍내 의원에 가서 할망들 틈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젊은 놈이 뭔 몸이 아프다고 누워 있냐는 핀잔도 받았지만 전기치료시 흐르는 ‘짜르르 짜르르’ 내 몸을 흐르며 자극하던 전기처럼 배드민턴은 내 전신을 휘감고 돌아 말초신경을 자극해 댔다. 육지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저녁의 취미생활이 생긴 것이다.     



오래전 회사 총무부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식 자리에서 선배가 주의를 주었다. 

“주중에는 절대 약속 같은 거 잡지 마. 야근 아니면 회식이니깐!”


그 후로 내 저녁시간은 당연한 것처럼 회사의 것이 되어 버렸다. 일은 늘 밀려 있었고, 술 좋아하는 상사들이 즐비했기에 한 달에 한두 번 정시 퇴근이라도 할라치면 큰 은혜를 입은 것처럼 황송해했다. 취미생활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지나고 보니 ‘이게 뭐람?’ 하는 후회가 들지만, 그때는 그랬다. 모두가 같이 남아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힘든 것은 풀고,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게 동료이고 업무의 자세라면서, 또 업무 사수와 부사수는 아내보다 더 살가운 사이가 되어야 한다면서......

내 삼십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내년 4,5월 되면 제주도와 서귀포시에서 동호인 배드민턴 대회들이 열려. 연습 열심히 해서 그때 초보자 대회 나가 우승해보게.”


클럽 회장님과 코치님의 동기부여에 쉬엄쉬엄 제주살이를 하던 내게도 작은 목표가 생겼다.     


“배드민턴 잘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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